2025/08 21

[나는 왜 까미노를 생각하는가] 내면의 상처를 안아주는 길

고요한 새벽, 길 위에서 만난 첫 번째 이야기 메세타 초입, 해가 막 솟아오르기 전의 공기는 차갑고, 땅은 밤새 맺힌 이슬로 촉촉했다. 배낭을 조정하며 첫 발을 내디딘 순간, 뒤에서 들려온 가벼운 발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그곳에는 회색 머플러를 두른 중년 여성이 서 있었다. 이름은 마리아(56, 독일).그녀는 눈을 마주친 뒤 살짝 웃으며 말했다. “저는 남편을 2년 전에 잃었어요. 그 후로 제 안의 세상이 멈춰 있었죠. 이 길이 저를 다시 움직이게 할지, 솔직히 두렵기도 해요.” 마리아는 남편과 함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로 계획했지만, 출발을 준비하던 해에 남편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그녀는 한동안 집 밖을 거의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남편의 유품 중 발견한 지도와, 함께 쓰던 순례 가이드북이 그..

카테고리 없음 2025.08.16

[까미노 길 위의 풍경] 스페인 시골마을의 커피 한 잔

길 위의 갈증이 향기로 변하는 순간아침 6시 반, 아직 하늘은 푸른 기운을 머금고 있지만 이미 첫 발걸음은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부르고스에서 나와 몇 시간을 걸었을까, 발 아래 자갈이 서걱이며 작은 먼지 구름을 만든다. 가방 속 물통의 물은 미지근해지고, 햇볕은 점점 각도를 높이며 어깨 위로 내려앉는다. 그럴 때면 입 안 가득 퍼지는 상상 속 향기가 있다. 바로 ‘카페 콘 레체(café con leche)’의 향. 까미노를 걸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단순한 커피 한 잔이 아니라, 그날 하루를 다시 걷게 만드는 연료이자 위로라는 사실을.스페인 시골마을의 바(bar)는 순례자들에게 하나의 ‘목표 지점’이 된다. 표지판에 마을 이름과 거리 수치가 나타날 때,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진다. 피로가 ..

카테고리 없음 2025.08.15

[나는 왜 까미노를 생각하는가] 오래된 꿈을 다시 찾기 위해

낯선 입구, 오래된 꿈의 호출아침 공기는 아직 서늘하고, 산등성이 너머로 부드러운 햇살이 흘러내립니다. 하루가 막 열리는 순간, 발밑의 흙길이 어제와 다르지 않은 듯 보이지만, 마음속에선 작은 떨림이 일어납니다. 까미노의 어느 구간이든, 처음 발을 내디딜 때의 그 ‘문턱’ 같은 감각은 늘 찾아옵니다.순례자들은 종종 말합니다. “나는 어쩌면 까미노를 걷기 전부터 이미 그 길 위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말에는 묘한 힘이 있습니다. 단순한 여행을 시작하는 마음이 아니라, 오래전 잊어버린 무언가를 다시 부르러 가는 듯한 긴장감. 우리가 이 길에 발을 디딜 때, 그 문턱은 ‘출발점’이 아니라 ‘오래된 꿈의 입구’에 가깝습니다.프랑스의 생장피드포르에서 길을 시작하던 한 순례자는 배낭을 메며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카테고리 없음 2025.08.14

[까미노 길 위의 풍경] 메세타를 걷다 – 고요함과 바람의 끝없는 풍경

메세타란 무엇인가메세타(Meseta)는 스페인 중부 고원 지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까미노 데 프란세스에서 부르고스와 레온 사이, 약 220km에 걸쳐 펼쳐진 평원으로, 고도는 평균 800m 안팎. 농경지가 대부분이며, 하늘과 들판, 그리고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흙길 외에는 특별한 지형 변화가 없습니다.나무가 드물어 그늘이 거의 없고, 여름에는 강한 햇볕이, 겨울에는 차가운 바람이 길을 지배합니다. 어떤 순례자는 이 단조로운 구간을 ‘걸을 가치가 없는 지루한 길’이라며 건너뛰기도 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이들은 바로 이 메세타를 ‘진짜 까미노가 시작되는 곳’이라고 부릅니다.“첫 번째 순례에서는 메세타를 피했어요. 두 번째 순례에서는 걸었죠. 그때 깨달았어요. 이곳이야말로 길의 본질이 시작되는 곳이라는 걸..

카테고리 없음 2025.08.13

나는 왜 까미노를 생각하는가?

가슴 속 깊은 죄책감을 씻기 위해 – “끝없는 길 위의 고해성사” 씻기지 않는 마음의 얼룩사람의 마음 속에는 누구에게도 쉽게 꺼내놓지 못하는 한 조각이 있습니다.그것이 크든 작든, 때로는 그저 “그럴 수 있었던 일”일 뿐인데,우리는 스스로를 가차 없이 심판합니다.어느 날, 지인의 한마디가 오래전 사건을 떠올리게 했습니다.무심코 지나쳤던 사람의 눈빛, 나의 선택으로 상처받았을지도 모를 누군가,그리고 그때 하지 못한 사과.그것들은 세월 속에서 잊히는 대신, 서서히 더 짙어진 얼룩이 되어 마음 한 구석을 무겁게 눌렀습니다.그래서 저는 까미노를 떠올렸습니다.끝없이 걷는 동안, 발걸음마다 묵직한 죄책감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그리고 혹시, 그 길 위에서 용서를 구할 용기를 얻을 수 있을까. 죄책감과 길 – 무게를 ..

카테고리 없음 2025.08.12

[까미노 길 위의 풍경] 레온 – 시간과 믿음이 공존하는 도시

― 순례길 위, 중세와 현재가 나란히 걷는 곳 길 위에서 만난 또 하나의 ‘멈춤’메세타의 끝없는 평원을 지나, 드디어 붉은 기와 지붕이 펼쳐진 도시가 보였다. 바람은 여전히 거칠었지만, 레온의 모습은 마치 오랜 친구처럼 나를 반겼다. 여기서는 시간도, 발걸음도, 심지어 마음도 잠시 속도를 늦춘다.도시와의 첫 만남 ― 대성당 앞에서레온의 심장은 단연 '레온 대성당(Catedral de León)'이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첨탑, 그리고 벽면을 가득 채운 스테인드글라스는 순례자의 피로를 한 번에 씻어낸다. 아침 햇살이 유리 조각을 통과해 바닥 위에 쏟아질 때, 그 빛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편지처럼 느껴진다.한 노신부가 성당 앞을 쓸고 있었다. 내가 인사를 건네자 그는 짧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여행..

카테고리 없음 2025.08.09

나는 왜 까미노를 생각하는가?

빚진 삶의 무게를 내려놓기 위해― 까미노, 내가 나에게 용서하는 길 멈추지 못했던 이유들“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마음속에 문득 떠오른 이 말 한마디.누구에게도 빚을 졌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늘 무언가에 빚지고 있다고 느끼며 살았다.부모에게, 사회에게, 실패한 과거에게, 혹은 나 자신에게.하루하루를 채무자처럼 살아내는 일상.그건 단지 통장의 잔고 때문만은 아니었다.더 잘해야 한다는 기대, 실망시켜선 안 된다는 죄책감, 미루어둔 감정의 청구서…그 모든 것이 마음의 빚이 되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그리고, 까미노가 떠올랐다. 까미노는 ‘도망’이 아닌 ‘내려놓음’이다많은 이들이 순례길에 오르는 이유 중 하나는세상을 등지고, 나를 되찾기 위해서다.하지만 내게 까미노는 ‘회피’가 아니었다. 오히려 ‘..

카테고리 없음 2025.08.08

[까미노 길 위의 풍경] 부르고스 대성당 – 고딕의 정수, 하늘로 향하는 믿음

― 부르고스에서 멈춰 선 이유 순례자의 걸음이 멈춘 순간이른 아침 안개가 남아 있던 부르고스의 거리.거친 돌길을 따라 걷던 나의 걸음은 어느 순간 멈춰섰다.눈앞에 펼쳐진 것은 거대한 고딕의 성소, 부르고스 대성당이었다.순례길에서 수없이 많은 교회와 예배당을 마주했지만,이 대성당은 달랐다.숨이 멎을 듯한 그 아름다움.건축이 아니라 신앙 자체가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느낌이었다. 이 성당은 단지 ‘종교의 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손이 만든 가장 아름다운 고백’이었다. “길을 걷던 나는 멈췄다.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돌의 숲 앞에서.”건축의 경이 “이 성당은 말이 아니라 천장을 보고 기도하게 만든다.” 부르고스 대성당(Catedral de Santa María de Burgos)은1221년, 페르난도 3..

카테고리 없음 2025.08.07

나는 왜 까미노를 생각하는가?

죽음과 삶을 깊이 생각하는 사색의 여정 ― 까미노, 삶의 끝에서 다시 삶을 바라보다 죽음을 떠올리는 순간, 삶은 선명해진다우리는 살아가면서 '죽음'을 종종 외면한다.너무 무겁고, 너무 멀고, 너무 불편해서.하지만 언젠가 반드시 다가올 것이라는 사실을우리는 알고 있다.까미노를 걷는 동안,나는 그 죽음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는 순간들과종종 마주쳤다.묘비 옆을 지나고,한 노인이 ‘다음 해엔 못 올 수도 있어’라고 말하고,메세타의 황량한 풍경 속에 문득‘내가 만약 여기서 멈춘다면’ 이라는 생각이 떠오른다.그런 순간들마다삶은 오히려 더 또렷하게 다가왔다.순례길 위의 묘비와 철십자가 – 죽음을 마주하는 장소들까미노에는 죽음을 기리는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포세바돈(Pocebadón)의 철십자가(Cruz de Fer..

카테고리 없음 2025.08.06

[까미노 길 위의 풍경] 팜플로나 – 투우의 도시, 순례자도 머무는 곳

― 전통과 열기, 그리고 조용한 걸음이 만나는 교차로 도시가 바뀌었다, 내 리듬도 잠시 멈췄다몇 날 며칠을 들판과 산길만 걷다가갑자기 ‘도시’라는 풍경을 마주하면 마음이 어색해진다.팜플로나에 도착한 날도 그랬다.좁은 골목길 대신 아스팔트와 자동차 소리,자연의 냄새 대신 커피와 구운 고기의 향.그러나 동시에,이 도시에는 길 위에서 흔히 느낄 수 없는 묘한 열기가 있었다.“팜플로나에 도착했구나.”한참을 걷고 나서야나는 이곳이 단순한 중간 기착지가 아니라,**‘멈춤을 허락하는 도시’**임을 깨달았다.투우와 순례의 교차점, 팜플로나팜플로나는 스페인 북부 나바라 지방의 중심 도시이자,전 세계적으로는 **‘산 페르민 축제(투우 축제)’**로 가장 유명하다.축제 때면 수천 명이 모이고,거리엔 하얀 옷과 붉은 스카프가..

카테고리 없음 2025.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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