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통과 열기, 그리고 조용한 걸음이 만나는 교차로
도시가 바뀌었다, 내 리듬도 잠시 멈췄다
몇 날 며칠을 들판과 산길만 걷다가
갑자기 ‘도시’라는 풍경을 마주하면 마음이 어색해진다.
팜플로나에 도착한 날도 그랬다.
좁은 골목길 대신 아스팔트와 자동차 소리,
자연의 냄새 대신 커피와 구운 고기의 향.
그러나 동시에,
이 도시에는 길 위에서 흔히 느낄 수 없는 묘한 열기가 있었다.
“팜플로나에 도착했구나.”
한참을 걷고 나서야
나는 이곳이 단순한 중간 기착지가 아니라,
**‘멈춤을 허락하는 도시’**임을 깨달았다.
투우와 순례의 교차점, 팜플로나
팜플로나는 스페인 북부 나바라 지방의 중심 도시이자,
전 세계적으로는 **‘산 페르민 축제(투우 축제)’**로 가장 유명하다.
축제 때면 수천 명이 모이고,
거리엔 하얀 옷과 붉은 스카프가 물결친다.
하지만 축제가 없는 날,
팜플로나는 순례자들에게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 구시가지의 고풍스러운 성벽
– 대성당의 종소리
– 골목 끝에서 손을 흔드는 마을 아이들
이곳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닌,
**‘순례자도 머무는 도시’**였다.
관광객처럼 머무는 것이 아니라,
걸어온 것을 돌아보고, 다시 걸을 힘을 얻는 곳.
오래된 도시 속 작은 카페에서
나는 구시가지에 있는 작은 카페에 앉아 있었다.
밖에는 햇살이 벽돌 위를 따뜻하게 굴러다니고,
가게 안에는 현지인들이 낮은 목소리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크루아상과 카페 콘 레체를 주문한 뒤
나는 천천히 노트를 펼쳤다.
그리고 그날 처음으로
지금까지의 길을 복기해보았다.
처음 날의 흥분,
비에 젖었던 저녁,
무릎이 아팠던 구간,
그리고 오늘.
팜플로나는
걷기와 멈춤이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장소였다.
도시에서 만난 늙은 순례자
카페 바깥 벤치에 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낡은 배낭, 닳은 지팡이,
햇빛에 탄 얼굴.
그는 팜플로나에서 며칠째 쉬고 있다고 했다.
“몸이 안 따라줘서 멈췄어요. 하지만 괜찮아요.
이곳도 순례의 일부니까요.”
나는 그 말을 곱씹었다.
팜플로나에서의 이 멈춤이,
나를 위한 배려일 수도 있겠구나.
이 도시가 순례길 위에 존재하는 이유는
단순히 길목이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멈춤의 용기’를 가르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헤밍웨이도 이 길을 지났을까 — 문학이 멈추고 머문 도시
팜플로나를 걷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 길을 헤밍웨이도 걸었을까?”
아니, 그는 걸었다.
걸었고, 마셨고, 썼고, 멈췄다.
1920년대의 젊은 헤밍웨이는
당시 이방인 무리들과 함께
산 페르민 축제가 열리는 7월의 팜플로나로 왔다.
그리고 이 도시의 열기와 어둠, 환희와 파멸,
투우의 생사와 술 취한 방황을 한 권의 소설로 남겼다.
그것이 바로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
그의 시선은
마을 광장을 스치던 투우사의 긴장감,
그림자처럼 도시를 채운 방랑자들,
그리고 무언가를 찾지만 늘 어긋나는 인간들의 모습에 머물렀다.
그가 앉았던 자리, 그가 멈췄던 순간
나는 구시가지의 Plaza del Castillo 광장을 걷다가
문득 조용한 테라스에 앉는다.
그곳엔 아직도 ‘헤밍웨이 스위트’가 남아 있고,
오래된 흑백 사진 속 그가 와인 잔을 들고 있다.
이 거리, 이 벽돌, 이 그늘.
그가 마주했던 빛과 그늘이
오늘 내게도 어렴풋이 전해진다.
헤밍웨이가 사랑한 건
투우의 폭력이나 축제의 흥분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오히려, 이 도시의 멈춤과 열기 사이에 있는
어딘가 흔들리는 균형의 순간을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순례자와 작가, 그리고 한 도시
나도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팜플로나는 단순한 도시가 아니었다.
걷다 멈추고, 멈춘 자리에서
지난 여정을 쓰고 싶은 충동이 드는 도시.
그가 그랬듯,
나도 이 도시에 앉아
한 잔의 커피와 한 장의 노트로
나의 방황을 기록하고 싶었다.
어쩌면 까미노란,
우리를 삶의 일부로 다시 쓰기 위해
글이든 침묵이든
잠시 멈추는 장면을 허락하는 길인지도 모른다.
“Pamplona gave me more than any other city I’ve ever visited. It gave me myself.”
— Ernest Hemingway
열기와 고요가 공존하는 도시
팜플로나는 역설적인 도시다.
– 한편으로는 열정과 환호의 상징이고,
– 다른 한편으로는 고요하고 사색적인 공간이 된다.
순례자에게 이 도시는
**“조용히 나를 돌아보게 해주는 공간”**이다.
도시의 소음을 지나
성당 안에서 조용히 앉아 기도하는 순간,
카페에서 노트를 꺼내 하루를 정리하는 순간,
그 모든 장면들이 팜플로나의 진짜 얼굴을 보여준다.
팜플로나는 내게 말했다.
“잠시 멈춰도 괜찮다. 이 멈춤도 너의 순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