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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까미노를 생각하는가] 내면의 상처를 안아주는 길

joyskim 2025. 8. 16.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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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새벽, 길 위에서 만난 첫 번째 이야기

 

 

 

메세타 초입, 해가 막 솟아오르기 전의 공기는 차갑고, 땅은 밤새 맺힌 이슬로 촉촉했다. 배낭을 조정하며 첫 발을 내디딘 순간, 뒤에서 들려온 가벼운 발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회색 머플러를 두른 중년 여성이 서 있었다. 이름은 마리아(56, 독일).
그녀는 눈을 마주친 뒤 살짝 웃으며 말했다.

 

“저는 남편을 2년 전에 잃었어요. 그 후로 제 안의 세상이 멈춰 있었죠. 이 길이 저를 다시 움직이게 할지, 솔직히 두렵기도 해요.”

 

마리아는 남편과 함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로 계획했지만, 출발을 준비하던 해에 남편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한동안 집 밖을 거의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남편의 유품 중 발견한 지도와, 함께 쓰던 순례 가이드북이 그녀를 길 위로 불러냈다.
메세타의 드넓은 평야를 걸으며 그녀는 내게 말했다.

“길이 제게 위로를 주는 건, 아무 말 없이도 제 옆에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저 함께 걸어주는 그 시간이, 제 상처를 조금씩 덮어주네요.”

 

한 모금의 물, 그리고 열려버린 마음의 문

 

부르고스 외곽의 어느 벤치에서, 한 청년이 물통을 내게 건넸다. 이름은 후안(29, 멕시코).
그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조심스레 자신의 이야기를 풀었다.

“아버지가 제게는 아주 무서운 사람이었어요. 인정도, 애정도 없었죠. 그러다 몇 달 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데… 눈물이 안 나더군요. 그게 너무 무서웠습니다.”

 

그는 자신을 ‘감정이 고장 난 사람’이라고 불렀다. 감정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고 기억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어서 까미노에 왔다고 했다.
부르고스에서 레온으로 가는 길, 그는 작은 마을의 성당에서 한참 동안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날 저녁,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 길 위에서 어떤 순례자가 제 어깨를 툭 치고는 ‘부엔 카미노’라고 했어요. 그 한마디에 갑자기 눈물이 났어요. 아마 이 길은, 내 마음의 얼음을 조금씩 녹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발의 통증보다 아픈 마음을 위해

레온의 한 알베르게(순례자 숙소)에서 만난 **소피아(42, 프랑스)**는 무릎에 두꺼운 아이스팩을 대고 있었다.
그녀는 몇 년 전 이혼을 했다. 남편의 폭언과 무관심 속에서 자존감은 바닥까지 떨어졌고, 사람을 믿는 법을 잊었다.

“처음에는 몸을 단련하려고 이 길에 왔어요. 하지만 걸을수록, 제 마음이 훨씬 더 무겁다는 걸 알게 됐어요.”

 

어느 날, 비가 쏟아지던 날씨에 소피아는 발목을 접질렸다. 그때 뒤따르던 한국인 순례자가 우산을 씌워주며 함께 마을까지 걸어갔다.

“그 사람의 이름도 몰라요. 하지만 그 날의 온기를 잊을 수 없습니다. 그 한 시간이, 몇 년 동안 잃었던 ‘사람에 대한 신뢰’를 조금은 되찾게 했거든요.”

 

침묵 속에서 만난 자기 목소리

 

피레네를 넘는 길에서 만난 **데이비드(35, 미국)**는 의도적으로 혼자 걷고 있었다.
그는 5년 전 큰 교통사고로 동생을 잃었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

“나는 형이자 가해자였어요. 경찰은 사고였다고 했지만, 제 마음은 그렇지 않았어요. 그래서 제 목소리를 지워버렸죠. 아무에게도 제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요.”

 

데이비드는 길 위에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나의 죄책감을 이야기했다’고 했다.
비 오는 날, 어떤 순례자가 그에게 “오늘 하늘이 참 무겁다”고 말하자, 데이비드는 문득 자신 마음 속 무거운 하늘 이야기를 꺼냈다.

“그 순간, 제 목소리가 다시 세상에 닿았어요. 길은, 제 침묵을 깨준 거죠.”

 

 

상처를 덮는 건 걷기가 아니라 사람

 

길 위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건 ‘걷기’지만, 상처를 치유하는 건 ‘만남’이었다.
각자의 사정은 다르지만, 까미노의 공기는 묘하게도 사람들의 마음을 열게 했다.
이름, 직업, 나이, 국적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 순간 옆에서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다는 사실이, 말보다 큰 위로였다.

 

                                                                       안토니오(스페인, 63)

“나는 암 치료를 마치고 이 길에 올 수 있었다. 내 몸은 지쳤지만, 이 길 위의 사람들은 나를 환자로 보지 않았다. 그냥 같은 길을 걷는 동행자로만 보았다. 그게 나를 다시 사람으로 살게 했다.”

 

 

까미노가 안겨주는 마지막 포옹

 

 

 

산티아고 대성당 앞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상처를 안고 출발했지만, 도착한 순간만큼은 모두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해냈다는 표정, 그리고 마음 한 구석이 조금은 가벼워졌다는 표정.
어떤 이는 친구와 부둥켜안고, 어떤 이는 하늘을 바라보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길은 상처를 없애주지 않는다. 하지만 상처를 안고도 걸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그게 바로 까미노가 주는 가장 큰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