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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미노 길 위의 풍경] 스페인 시골마을의 커피 한 잔

joyskim 2025. 8. 15.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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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갈증이 향기로 변하는 순간

아침 6시 반, 아직 하늘은 푸른 기운을 머금고 있지만 이미 첫 발걸음은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부르고스에서 나와 몇 시간을 걸었을까, 발 아래 자갈이 서걱이며 작은 먼지 구름을 만든다. 가방 속 물통의 물은 미지근해지고, 햇볕은 점점 각도를 높이며 어깨 위로 내려앉는다.

 

그럴 때면 입 안 가득 퍼지는 상상 속 향기가 있다. 바로 ‘카페 콘 레체(café con leche)’의 향. 까미노를 걸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단순한 커피 한 잔이 아니라, 그날 하루를 다시 걷게 만드는 연료이자 위로라는 사실을.

스페인 시골마을의 바(bar)는 순례자들에게 하나의 ‘목표 지점’이 된다. 표지판에 마을 이름과 거리 수치가 나타날 때,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진다. 피로가 극에 달할 즈음, 마을 어귀에 걸린 ‘Bar’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오면 심장이 먼저 반응한다.

 

 

 

문을 열자, 시간의 냄새가

 

나무문을 밀고 들어서면, 종소리처럼 가벼운 ‘딩~’ 소리가 울린다. 한쪽 벽에는 오래된 사진들이 걸려 있다. 황소경기, 수확 축제, 그리고 이 바를 거쳐 간 수많은 순례자들의 사진. 주방 쪽에서는 증기 소리가 ‘쉬익—’ 하고 울리고, 그 뒤를 따라 고소하고 진한 커피 향이 공기를 가득 채운다.

 

스페인의 시골 바는 단순한 상업 공간이 아니다. 마을 사람들의 사랑방이자 정보센터, 그리고 순례자들에게는 작은 안식처다. 바닥에는 타일이 반짝이고, 바 위에는 갓 구운 크루아상과 초콜릿으로 덮인 네포리타스가 놓여 있다.

주인은 은빛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빗어 넘긴 여든 살가량의 할아버지. 손놀림은 느리지만, 그 안에는 묘한 여유와 정성이 담겨 있다. 그는 내가 주문한 ‘카페 콘 레체’를 만들기 위해, 에스프레소 머신에 갓 간 원두를 넣고 단단하게 눌렀다. 이어서 스팀 노즐을 우유 피처에 넣자, 부드러운 거품이 피어오르며 달콤한 향이 퍼졌다.

 

 

첫 모금, 그리고 온몸으로 번지는 해방감

 

작은 하얀 잔에 담긴 카페 콘 레체는 표면에 미세한 거품이 반짝였다. 나는 손바닥으로 잔의 온기를 느끼며 입술을 댔다. 부드러운 우유와 진한 에스프레소가 혀끝에서 만나, 쓴맛과 단맛이 절묘하게 섞인다. 그 첫 모금은 마치 오랜만에 듣는 위로의 목소리처럼 깊고 따뜻했다.

 

몸속에 퍼지는 카페인의 기운이 발끝까지 닿는 듯했고, 어깨의 긴장도 서서히 풀렸다. 단순히 피로를 회복하는 게 아니라, 길 위에서 멈춰 서는 허락을 받은 기분이었다. 커피는 단지 음료가 아니라, 이 여정에서 나를 다시 걸을 수 있게 하는 의식 같은 존재였다.

 

커피를 사이에 두고 오고 가는 이야기

 

맞은편 테이블에는 독일에서 온 부부 순례자가 앉아 있었다. 남편은 지도 앱을 확인하며 오늘의 목표를 점검했고, 아내는 가방 속에서 초콜릿 바를 꺼내 반을 내게 건넸다.

“이 길에선 나누는 게 더 달콤하죠.”
그 한마디에 우리 모두 웃었다.

옆자리에는 마을 주민인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내 배낭의 조개껍데기를 가리키며 물었다.

“산티아고까지 얼마나 남았나요?”
“아직 멀었어요. 하지만 커피 덕분에 오늘은 조금 더 걸을 수 있겠네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은 다 가족 같아요. 오늘도 좋은 길 되길.”


그 짧은 대화 속에는, 언어와 국경을 초월한 인간적인 온기가 있었다.

 

 

 

스페인 커피의 특징과 까미노의 ‘바 문화’

 

스페인의 커피는 작지만 강렬하다. 에스프레소 베이스의 음료가 주를 이루며, 시골 바에서는 유기농 우유를 쓰거나, 주인의 손맛이 묻어나는 방식으로 제공된다. 순례자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카페 콘 레체’와 ‘카페 솔로(에스프레소)’. 오전에 걸음을 시작하고 2~3시간 뒤 들르는 바에서 커피 한 잔과 ‘토스타다(토스트)’를 곁들이는 것은 하나의 관습이자 작은 보상이다.

 

까미노의 바는 순례자들의 정보 교환 장소이기도 하다. 내일의 숙소 예약, 날씨 정보, 길 상태에 대한 이야기들이 커피 잔 위를 가볍게 날아다닌다. 그리고 그 정보와 함께, 짧지만 진한 인간적인 관계도 함께 남는다.

 

커피가 주는 여유, 그리고 발걸음의 변화

 

커피를 다 마시고 나면, 다시 길을 떠나야 한다. 하지만 그때의 발걸음은 출발 전과 다르다. 카페인의 힘 때문만은 아니다. 누군가와 나눈 웃음, 주인의 짧은 인사, 마을 광장에서 본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마음에 남아,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광장을 나서며 할아버지 주인은 내게 손을 흔들었다.

“부엔 카미노!”

그 인사는 마치 오늘 하루를 끝까지 잘 걸어낼 수 있을 거라는 축복처럼 들렸다.

 

다음 마을까지 이어지는 향기

 

마을을 벗어나 다시 흙길로 접어들면, 아직도 입안에는 카페 콘 레체의 부드러운 여운이 남아 있다. 그것은 단순한 맛이 아니라, 마을의 공기와 사람들의 미소가 섞인 향기다. 그 향기는 다음 마을, 다음 바, 다음 커피 한 잔을 향한 작은 설렘이 된다.

순례길에서 커피 한 잔은 결코 사소한 휴식이 아니다. 그것은 피로와 의지를 잇는 다리이자, 길 위의 인간적인 온기를 확인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 순간이 쌓여, 까미노는 단순한 길이 아닌 ‘사람의 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