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진 삶의 무게를 내려놓기 위해
― 까미노, 내가 나에게 용서하는 길
멈추지 못했던 이유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마음속에 문득 떠오른 이 말 한마디.
누구에게도 빚을 졌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늘 무언가에 빚지고 있다고 느끼며 살았다.
부모에게, 사회에게, 실패한 과거에게, 혹은 나 자신에게.
하루하루를 채무자처럼 살아내는 일상.
그건 단지 통장의 잔고 때문만은 아니었다.
더 잘해야 한다는 기대, 실망시켜선 안 된다는 죄책감, 미루어둔 감정의 청구서…
그 모든 것이 마음의 빚이 되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리고, 까미노가 떠올랐다.
까미노는 ‘도망’이 아닌 ‘내려놓음’이다
많은 이들이 순례길에 오르는 이유 중 하나는
세상을 등지고, 나를 되찾기 위해서다.
하지만 내게 까미노는 ‘회피’가 아니었다. 오히려 ‘응시’였다.
나는 그 길 위에서 도망치려던 마음 대신, 마주하고 내려놓는 연습을 시작했다.
- 조용한 마을 골목에서,
- 내 앞을 걷는 순례자의 뒷모습에서,
- 작은 성당의 벤치에 앉아 쉬는 오후 햇살 속에서,
나는 질문 대신 숨을 쉬었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 ‘왜 그렇게까지 했냐’는 물음을 받지 않아도 되는 세계.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무거운 배낭만큼이나 무겁던 "마음의 짐”을 천천히 내려놓을 수 있었다.
빚을 안고 걷는 사람들
길 위에는 나와 같은 사람들이 많았다.
“형제의 유산을 놓고 다투다 가족과 등졌어요.”
“어머니를 끝까지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있어요.”
“내가 낳은 아이지만, 아직도 엄마 자격이 없다고 느껴요.”
우리는 서로의 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다만, 서로 옆에서 함께 걸었다. 말없이, 온기를 나누며.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빚은 꼭 갚아야만 끝나는 게 아니다. 내려놓음으로도 끝낼 수 있다.”
내려놓고 나면 보이는 것들
까미노 길에서, 어느 순간 나는 알게 되었다.
어쩌면 나는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받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결국 “나 자신을 용서하는 일”이었다.
스스로에게 건넨 말 한마디.
“그만해도 돼.”
“그만 지고 살아도 돼.”
그 순간, 처음으로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것은 누구의 이해나 용서보다 먼저 와야 할 용서였다.
순례자의 목소리
🔗 "삶의 무게와 슬픔을 이고 걷다"
한 순례자는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며 Camino로 나섰습니다. 그는 “내 배낭은 단지 짐을 담는 그릇이 아닌,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미안함을 담은 무게였다”고 표현했죠. 그 길은 단지 물리적 여정이 아니라 감정의 짐을 마주하고 풀어내는 치유의 여정이었습니다.
🔗 "과거의 빚, 감정의 빚을 내려놓다"
또 다른 블로거는 “많은 사람들이 삶에서 막다른 상황이나 깊은 회환, 무언의 책임감을 안고 Camino를 걷는다”며, “걷는 행위 자체가 과거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에게 이 길은 스스로를 용서하고, 마음의 빚을 털어내는 성찰의 도구였습니다.
🔗 " '여행’이 아니라 ‘영적 정화’ "
캠핑장 주변의 묘비, 철십자가, 순례자들이 남긴 작은 묘사들을 바라보며 한 작가는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던진 돌 하나하나에 가족을, 후회된 말들을 담았다. 그리고 돌을 내려놓는 순간, 마치 죄책감도 함께 내려놓는 기분이었다.”걷기는 빚을 갚기 위한 신체적 행위가 아니라,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 영적 회복이었죠.
길 위에서 내 삶을 다시 쓰다
까미노는 나에게 ‘빚을 다 갚았다’는 선언이 아니었다.
그저, ‘더는 빚지지 않아도 된다’는 용기의 시작이었다.
나는 아직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하지만 이제는 그 빚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모든 감정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음을 안다.
지금 내 어깨엔 여전히 배낭이 있지만,
그 안에는 ‘책임’이 아니라 ‘자유’가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