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입구, 오래된 꿈의 호출
아침 공기는 아직 서늘하고, 산등성이 너머로 부드러운 햇살이 흘러내립니다. 하루가 막 열리는 순간, 발밑의 흙길이 어제와 다르지 않은 듯 보이지만, 마음속에선 작은 떨림이 일어납니다. 까미노의 어느 구간이든, 처음 발을 내디딜 때의 그 ‘문턱’ 같은 감각은 늘 찾아옵니다.
순례자들은 종종 말합니다. “나는 어쩌면 까미노를 걷기 전부터 이미 그 길 위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말에는 묘한 힘이 있습니다. 단순한 여행을 시작하는 마음이 아니라, 오래전 잊어버린 무언가를 다시 부르러 가는 듯한 긴장감. 우리가 이 길에 발을 디딜 때, 그 문턱은 ‘출발점’이 아니라 ‘오래된 꿈의 입구’에 가깝습니다.
프랑스의 생장피드포르에서 길을 시작하던 한 순례자는 배낭을 메며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스무 살 때 꿈꾸던 모습이 있었어요. 그 꿈은 시간이 흐르면서, 결혼, 직장, 아이… 이런 것들에 묻혀 점점 희미해졌죠. 그런데 이 길이 그걸 다시 부르네요. 내가 잊고 있던 나를, 그 꿈을.”
길 위에서 오래된 꿈은 종종 예상치 못한 순간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멀리 보이는 작은 마을의 종탑, 길가에 핀 들꽃 한 송이, 이정표 옆에 놓인 누군가의 낡은 모자… 그런 사소한 장면들이 과거의 시간을 열어젖히고, ‘그때의 나’와 마주하게 합니다.
나도 그랬습니다. 메세타 평원을 건너던 날, 눈앞엔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이 없는 풍경이 펼쳐져 있었죠. 하지만 발걸음마다 오래전 꾼 꿈의 잔향이 되살아났습니다. 학생 때, 밤새도록 그리던 그림.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 현실의 무게에 눌려 장롱 속에 접어 넣었던 계획서. 마치 바람 속에서 누군가 제 이름을 불러주는 것처럼, 그 모든 것이 조금씩, 또렷하게 떠올랐습니다.
길 위에서 만난 한 노르웨이 여성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내 꿈은 플루트를 배우는 거였어요. 그런데 부모님은 음악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죠. 대신 경제학을 전공했고, 안정적인 회계사가 되었어요. 하지만 지금 여기서, 매일 아침의 고요와 저녁의 석양 속에서, 나는 손끝에 다시 음을 얹는 상상을 해요. 언젠가 집으로 돌아가면 악기를 살 거예요. 그리고 연주를 시작하겠죠.”
그녀의 눈빛은 마치 이미 플루트를 연주하고 있는 사람처럼 빛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길의 힘입니다. 까미노는 잊혀진 꿈을 단순히 ‘떠올리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꿈을 다시 ‘살아있게’ 만듭니다.
어떤 이들은 말합니다. “나는 그 꿈을 완성하기 위해 걷는다”고.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속삭입니다. “나는 그 꿈을 다시 사랑하기 위해 걷는다”고. 완성 여부와 상관없이, 길 위에서 그 꿈과 재회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삶이 달라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아침의 빛은 점점 짙어지고, 그림자는 짧아집니다. 그 순간, 발걸음은 현실을 걷고 있지만, 마음은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건너고 있습니다. 이 길 위에서, 오래된 꿈은 결코 박제된 과거가 아닙니다. 그것은 여전히 살아 있는, 그리고 다시 손에 쥘 수 있는 ‘지금’의 일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걷습니다. 언덕 너머, 다음 마을, 그리고 그 끝에 있을지도 모를 나의 옛 꿈을 향해. 까미노의 낯선 입구는, 사실 가장 친숙한 문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 문 너머에는, 한때의 나, 그리고 내가 다시 만나고 싶은 나의 꿈이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다시 꺼낸 아이의 꿈
길 위에서 만난 한 프랑스 남성은 가볍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릴 적 제 꿈은 화가였어요. 스케치북과 색연필을 끼고 다니던 소년이었죠. 하지만 그건 현실적이지 않다는 말을 너무 자주 들었어요. 그래서 나는 색을 버리고 숫자를 택했죠. 은행원이 되었지만, 언제나 뭔가 빼앗긴 기분이었어요.”
그가 까미노에 나온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매일을 바쁘게 채우는 대신, 한 걸음마다 그 꿈의 냄새를 다시 맡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길 위에서 매일 한 번씩 멈춰 서서, 주머니 속 작은 수첩에 풍경을 그렸습니다. 그림은 서툴렀지만, 그의 눈빛은 그 어떤 완벽한 선보다 더 살아 있었습니다.
길 위에서 ‘아이의 꿈’은 생각보다 쉽게 깨어납니다. 차가운 새벽 공기에 스치는 흙냄새, 먼 언덕 위로 번지는 해질녘의 금빛, 비 온 뒤 공기 속에 묻어나는 풀향기… 이 단순한 감각들이 오래전 우리가 가졌던 열망을 불러냅니다. 우리가 잊고 있던 그 꿈은, 사실 결코 사라진 적이 없습니다. 단지 묵혀져 있었을 뿐입니다.
한 스페인 여성은 나지막이 고백했습니다.
“12살 때 저는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악기를 팔아야 했죠.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서 승진도 했지만, 마음 한켠에는 늘 빈자리가 있었어요. 까미노를 걷기 시작하고, 산길을 오를 때마다 마음속에서 그 바이올린이 다시 울렸어요. 소리를 흉내내면서 걸었는데, 어느새 눈물이 나더군요.”
그녀는 여정을 마친 후 작은 중고 바이올린을 구입했다고 합니다. 직장 생활은 여전히 이어가지만, 주말마다 동네 악단에서 연주하는 시간이 삶의 중심이 되었다고요. 까미노가 그녀에게 가져다준 건 바로 **“다시 꿈꾸는 능력”**이었습니다.
나 역시 걸으면서 한때의 꿈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어린 시절, 종이와 펜만 있으면 하루를 보낼 수 있었던 그때. 사소한 이야기라도 쓰고 나면 세상이 조금 더 넓어졌던 그 시절. 사회에 나와선 ‘쓸모’와 ‘이익’이 없는 일에 시간을 쓰는 건 사치라고 믿게 되었죠. 하지만 까미노의 길 위에서, 나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저녁, 발이 부르트고 어깨가 뻐근한 상태에서도, 그날 본 풍경과 느낀 감정을 몇 줄씩 적어 내려갔습니다. 그 글은 완성된 책이 되진 않았지만, 나를 나답게 만드는 힘이 되었습니다.
길 위에서 순례자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건, 그 꿈이 꼭 현실적으로 완성되어야 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중요한 건, 그 꿈과 다시 ‘연결’되는 순간입니다. 까미노는 우리가 잊고 있던 그 연결을 회복하게 합니다. 그것이 잠든 아이의 손을 다시 잡아주는 것처럼, 아주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많은 순례자들은 말합니다. “내 꿈을 실현하러 가는 게 아니라, 내 꿈을 다시 사랑하러 가는 거라고.” 완성과 성취 이전에, 그 꿈과 함께 있는 시간이야말로 우리가 길 위에서 얻게 되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중년의 길 위에서 만난 ‘다시 스스로로’
중년이란, 흔히 “안정”이라는 단어로 설명되지만, 그 안정이 꼭 평화와 같은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안정의 껍질 안에서 서서히 마르는 갈증을 느끼기도 합니다. 까미노에서 만난 많은 중년 순례자들은 그 갈증의 이름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마드리드에서 온 한 53세의 남성은 직장에서 30년을 일했습니다. 그는 퇴직을 5년 앞두고 있었습니다.
“직장에서 인정도 받고, 가족도 무탈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원해서 여기에 있는 건가?’라는 질문이 떠오르더군요. 그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까미노는 그 답을 찾으려는 제 몸부림이었어요.”
그는 부르고스를 지나 메세타에 들어서자, 매일 같은 풍경 속에서 조금씩 달라지는 자신의 마음을 느꼈다고 합니다. 처음엔 지루함, 그 다음엔 불안, 그리고 나중엔 설명할 수 없는 평온. 그는 그 변화를 ‘나 자신과의 재회’라고 표현했습니다.
길 위의 중년 순례자들은 대체로 ‘다시 시작’이라는 단어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한 번 이상의 인생 챕터를 닫아본 사람들이고, 새로운 페이지를 열기 위해서 필요한 용기와 상실감을 잘 압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건, 주변의 기대와 자신의 욕망을 구분하는 일입니다.
영국에서 온 48세 여성 순례자는 이혼 후에 길에 올랐습니다.
“결혼 생활이 끝난 후, 사람들은 저에게 앞으로 무엇을 할 거냐고 물었죠. 하지만 저는 오히려 ‘나는 누구였지?’라는 질문이 먼저 떠올랐어요. 까미노에선 매일 새벽, 고요한 길 위에서 그 질문과 마주했어요. 그리고 조금씩, 사람들의 기대가 아닌, 내가 원하는 삶의 색을 그려갔죠.”
그녀는 매일 아침, 길가에서 핀 작은 꽃의 색을 기록하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렇게 모인 색채의 기록은 돌아온 뒤 그녀의 삶을 재구성하는 ‘팔레트’가 되었다고 합니다.
중년의 까미노는 젊은 시절의 모험과는 다릅니다. 몸은 예전 같지 않고, 짐을 줄이는 법을 배워야 하며, 속도보다 지속이 중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이들은 걸음을 멈추는 것도 배웁니다.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고, 바람을 느끼는 시간 속에서 스스로를 다시 발견합니다.
포르투갈에서 온 한 50대 순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까미노에서 처음 멈춰 앉아 점심을 먹던 날, 아무도 나를 재촉하지 않았어요. 회사에서는 늘 시계를 보며 움직였는데, 여기선 내 배가 부르고, 내 다리가 쉬고 싶을 때 멈출 수 있었죠. 그게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그 순간 나는 내 삶의 속도를 내가 정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이렇듯, 까미노는 중년에게 단순히 ‘여행’이 아니라 속도를 되찾는 행위이자, 자신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의식이 됩니다. 길 위의 고독과 대화, 예상치 못한 만남과 이별, 그리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발걸음 속에서, 그들은 더 이상 타인의 기준이 아닌, 자기만의 리듬으로 걷는 법을 배웁니다.
그래서 많은 중년 순례자들은 여정을 마치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 길에서 새로운 내가 된 게 아니라, 오래전의 나를 되찾았다.”
그 문장은 다소 담담하게 들리지만, 그 속엔 삶의 방향을 바꾸는 거대한 결심과도 같은 힘이 담겨 있습니다. 까미노의 길은 그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기보다, 이미 그들 안에 있던 세상을 꺼내어 다시 빛을 보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다시 스스로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꿈을 붙잡은 마지막 걸음
순례길의 마지막 며칠, 발바닥은 이미 두꺼운 굳은살로 덮였고 어깨는 배낭의 무게를 오래전에 체념한 듯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이상하게도 처음보다 더 가벼워집니다. 그 가벼움은 단순한 끝에 대한 안도감이 아니라, 지금이야말로 내가 붙잡으려는 것이 손에 닿아온다는 확신에서 비롯됩니다.
포르투갈에서 온 한 순례자는 20년 동안 꿈속에만 그리던 장면을 현실로 만나러 이 길을 걸었습니다.
“저는 언제나 바다를 따라 걷고 싶었어요. 하지만 늘 시간이 안 되고, 돈이 없고,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말하면 제 계획을 접었죠. 이번에는 아무도 말리지 못하게 했어요. 그리고 오늘, 끝이 보이자, 그 바다 냄새가 멀리서부터 불어오더군요.”
그녀는 마지막 날, 해질녘의 빛 속에서 수평선을 바라보며 자신이 이 길에 온 이유를 다시 확인했다고 합니다. 그 순간, 20년 넘게 미뤄온 자신의 꿈을 ‘미루지 않을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죠.
질병을 넘어 이 길에 선 사람들의 이야기는 더욱 깊게 다가옵니다.
한 미국인 여성은 다발성 경화증 진단을 받고 한동안 휠체어 생활을 했습니다. 치료와 재활 끝에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었지만, 매일의 걸음이 두려움과 함께 찾아왔다고 합니다.
“이 길의 마지막 언덕을 오를 때, 다리에 힘이 빠지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 순간 깨달았어요. 내가 걷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내 꿈이었다는 걸. 그리고 지금 그 꿈이 내 발밑에서 숨 쉬고 있다는 걸.”
그녀에게 목적지는 단순히 산티아고 대성당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자신의 몸과 삶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상징이었습니다.
길 위에서 만난 한 젊은 순례자는 조금 다른 이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세상과 거리를 두기 위해 까미노를 선택했습니다.
“회사를 나왔을 때, 사람들은 무책임하다고 했어요. 하지만 제게는 꼭 확인해야 할 꿈이 있었어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질문이었죠. 마지막 며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어요. 가능하다고, 해볼 수 있다고.”
그는 돌아간 뒤 작은 목공소를 열었고, 까미노에서 배운 ‘매일 조금씩 나아가기’라는 원칙으로 자신의 일을 키워가고 있다고 합니다.
마지막 걸음은 언제나 단순한 ‘도착’이 아닙니다. 그 발걸음에는 길 위에서 흘린 땀과 눈물, 수없이 주고받은 대화와 침묵, 그리고 그 모든 시간 속에서 점점 또렷해진 꿈의 형상이 함께 묻어 있습니다.
노르웨이에서 온 한 60대 순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산티아고에 들어설 때, 그 꿈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느꼈죠. 하지만 그 시작을 가능하게 한 건 바로 이 길이었어요. 그리고 그 마지막 걸음이었죠.”
마지막 날, 성당 첨탑이 멀리 보일 때, 많은 순례자들은 발걸음을 늦춥니다. 도착이 아쉬워서라기보다,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어서입니다. 그 순간, 마음속에서 그들이 붙잡아온 꿈이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현실 속에 자리 잡습니다.
이 길의 마지막 걸음은 그래서 ‘마침표’가 아니라 ‘숨표’에 가깝습니다. 잠시 멈춰 숨을 고르고, 다시 내 삶의 문장 속으로 그 꿈을 데려가는 쉼표. 까미노가 주는 선물은 그 꿈을 완성하는 법이 아니라, 그 꿈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하는 것입니다.
꿈을 향한 리추얼로서의 까미노
까미노에서 걷는 행위는 단순한 이동이 아닙니다. 출발과 도착 사이의 수많은 발걸음은, 하나의 커다란 의식(ritual)과도 같습니다. 이 길을 걸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압니다. 매일 아침 신발끈을 묶는 순간부터, 그날의 첫 걸음을 내디딜 때까지의 동작이 기계적이면서도 경건한 반복이 된다는 것을.
아침 공기를 들이마시고, 배낭의 무게를 어깨에 올리고, 발끝으로 땅을 느끼며 첫 발을 내딛는 순간—그건 단순히 ‘오늘도 걸어야 한다’는 의무가 아니라, ‘오늘도 내 꿈에 다가간다’는 선언과 같습니다. 이런 반복 속에서 순례자들은 자신만의 속도와 마음의 리듬을 찾습니다.
매일의 작고 확실한 의식들
길 위의 하루는 늘 비슷한 순서로 흘러갑니다. 새벽에 눈을 뜨면 조용히 짐을 챙기고, 알베르게를 나서서 아직 식지 않은 하늘빛을 바라보며 첫 걸음을 내딛습니다. 걷다가 표지석의 노란 화살표를 확인하고, 중간중간 물을 마시며 숨을 고릅니다. 이 단순하고 반복적인 행위들이 하나의 루틴이자 리추얼이 됩니다.
심리학적으로도, 이런 반복은 뇌에 안정감을 주고, 불확실한 상황에서 방향성을 부여한다고 합니다. 순례자들에게 이 리추얼은 매일의 피로와 낯선 환경 속에서 마음을 지켜주는 안전망입니다.
꿈을 잊지 않기 위한 ‘확인 동작’
길 위에서 만난 한 이탈리아 순례자는 매일 아침 출발 전, 손바닥에 작은 동그라미를 그렸습니다.
“이건 내가 왜 걷는지를 잊지 않기 위한 표시예요. 손바닥을 볼 때마다 내 꿈을 떠올리죠.”
그의 꿈은 작곡가가 되는 것이었고, 까미노 동안 그는 매일 휴대폰 녹음기로 길 위의 소리를 담았습니다. 바람, 새소리, 발걸음, 다른 순례자들의 웃음소리… 이 소리들이 모여 그의 꿈을 향한 ‘사운드 트랙’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리추얼은 거창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 모금의 물을 마시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 하루에 한 번 스스로에게 “나는 왜 걷는가”라고 묻는 것, 그리고 그 답을 마음속에 새기는 것. 이런 단순한 행동들이 매일 반복되며, 꿈을 향한 집중을 유지시켜 줍니다.
길 끝에서 완성되는 ‘의식의 폐막’
여정이 끝나면 리추얼도 끝나는 걸까요? 많은 순례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마지막 걸음을 내딛고 대성당 앞에 섰을 때, 그들은 안도감과 동시에 이 의식을 삶 속에 이어가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캐나다에서 온 한 순례자는 귀국 후에도 매일 아침 20분씩 동네를 걷는다고 했습니다.
“까미노에서 배운 건, 꿈을 향해 가는 건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작은 반복이라는 거였어요. 하루에 조금씩, 하지만 꾸준히. 그게 의식이고, 그게 힘이에요.”
까미노가 남긴 리추얼의 힘
까미노의 리추얼은 걷는 시간 동안 꿈을 잊지 않게 해줄 뿐 아니라, 현실로 돌아가서도 그 꿈을 지켜내는 힘이 됩니다. 길 위에서 배운 반복과 집중, 그리고 스스로를 다잡는 방법은 일상 속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마지막 날, 대성당 앞에 선 순례자들은 종종 울음을 터뜨립니다. 그것은 단순히 완주에 대한 기쁨이 아니라, 자신의 꿈과 함께 매일 걸어온 날들의 무게가 한꺼번에 풀려나오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눈물은 리추얼이 완성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이자, 새로운 리추얼이 삶 속에서 시작될 것을 예고하는 선언입니다.
이렇게 까미노는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꿈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의 장엄한 의식입니다. 반복 속에서 다져진 의지는 길 끝에서도 꺼지지 않는 불씨로 남아, 우리를 앞으로도 한 걸음씩, 그리고 꾸준히 꿈 쪽으로 이끌어줍니다.
마무리 여운
길이 끝났다고 해서 여정이 끝나는 건 아니었습니다. 산티아고 대성당 앞에서 배낭을 내려놓는 순간,
그동안의 무게가 한꺼번에 풀려나가며 숨이 길게 빠져나갔습니다. 하지만 그 숨 속에는 단순한 피로 해소 이상의 것이 섞여 있었습니다. 수백 킬로미터를 걸어온 동안 내 몸에 밴 리듬, 마음속에 자리 잡은 질문, 그리고 길 위에서 다시 만난 나 자신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날 밤, 순례증을 손에 쥔 채 알베르게의 침대에 누웠을 때,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종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거리의 음악이 이상하게 익숙하게 느껴졌습니다. 비록 처음 듣는 소리였지만, 마치 오래전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배경음 같았습니다.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이 길의 끝이 곧 또 다른 시작이라는 것을.
까미노에서의 매일은 규칙적이면서도 변덕스러웠습니다. 날씨, 풍경, 사람, 대화, 침묵—all of it. 그리고 그 안에서 나는 ‘예측 불가능한 하루’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 하루하루가 내 삶에 스며든 이상, 일상으로 돌아가더라도 나는 이제 똑같은 방식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길 위에서 나눈 짧은 대화들이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왜 이 길을 걷나요?”
“그냥… 나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요.”
이 간단한 대답이야말로, 내가 느낀 모든 여운을 설명해 주는 문장이었습니다.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그리고 다시 나를 찾아가기 위해, 우리는 각자의 속도로 걷고 있었습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다 문득 생각했습니다. 까미노의 풍경은 사진으로 담을 수 있지만, 그 여운은 오직 나만이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 여운은 앞으로 내 삶을 선택하는 모든 순간에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 것입니다. “네가 정말 원하는 건 무엇이었는지 기억해.”
이제 나는 매일 아침, 신발끈을 묶을 때면 그때의 첫 발걸음을 떠올립니다.
길 위에서 배운 건, 꿈을 향해 가는 건 한 번의 거대한 결심이 아니라, 작지만 꾸준한 걸음들의 누적이라는 것. 그 작은 걸음들이 모여, 언젠가 내가 그리는 삶에 닿게 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저는 이제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여정의 가장 큰 선물은 ‘완성된 나’가 아니라 ‘계속 변해가는 나’를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까미노는 나를 바꿔놓은 게 아니라, 내가 이미 가진 가능성을 매일 꺼내 쓰게 만든 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 여운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일 새롭게 피어나는 향처럼, 나를 따라다닙니다.
이제 나는 압니다. 그 여운은 단순히 여행의 기억이 아니라, 앞으로 살아갈 나의 방식이라는 것을. 그리고 언젠가 다시 길 위에 서게 될 때, 그 여운은 나를 미소 짓게 하며 이렇게 속삭일 것입니다. “우린 이미 그 길 위에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