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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 식탁 – 물과 와인 사이에서

joyskim 2025. 8. 30.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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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길 위의 하루는 식탁에서 완성된다

 

까미노의 하루는 걷는 데서 시작하지만, 결국 식탁에서 완성된다. 순례자들은 해가 뜨기 전 길을 떠나, 메세타의 바람과 산길의 오르막을 지나며 땀을 쏟는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마을 식당, 알베르게의 공동 테이블, 혹은 작은 바의 한 구석에 앉아 하루를 마무리한다. 지친 얼굴이지만, 테이블 위의 빵과 와인, 그리고 함께 둘러앉은 동료 순례자들의 웃음 속에서 하루의 무게가 풀린다. 식탁은 단순한 끼니가 아니라 위로와 교감, 새로운 이야기의 출발점이다.

 

 

물과 와인 – 낯선 문화의 충격

 

한국 순례자들이 가장 먼저 놀라는 풍경은 바로 물값과 와인값의 역전이다. 한국에서는 당연히 무료로 제공되는 물이 스페인에서는 유료다. 반대로 와인은 무료로 제공되거나 아주 저렴하다. “와인보다 물이 더 비싼 나라”라는 농담은 순례자 식탁에서 자주 오간다.
어떤 날은 순례자 메뉴에 와인이 포함되어 있어 모두가 한 병씩 나눠 마신다. 그 자리에서 평소 술을 잘 못하던 순례자도 “오늘은 공짜니까”라며 잔을 비우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더 큰 소리로 웃는다. 물과 와인 사이에서 순례자들은 문화의 차이와 새로운 경험의 즐거움을 동시에 배운다.

 

순례자 메뉴 – 배고픈 하루를 채우는 한 끼

 

순례자의 저녁은 대개 메누 델 페레그리노(Menu del Peregrino)로 끝난다. 전채, 메인, 디저트, 와인까지 포함된 세트 메뉴가 10~15유로.

  • 아침은 크루아상과 커피, 오렌지 주스 정도.
  • 점심은 길 위에서 치즈, 하몽, 바게트, 과일을 꺼내 간단히 해결한다.
  • 저녁은 순례자 메뉴를 통해 하루를 마무리한다.

이 식탁에서는 국적과 언어를 넘은 대화가 꽃핀다. 옆자리의 독일인이 발에 생긴 물집 얘기를 하면, 한국 순례자가 소독약을 꺼내 보여준다. 하루의 고단함과 인간적인 온기가 함께 배어드는 공간, 그것이 까미노의 순례자 식탁이다.

 

스페인의 음식들 – 맛과 이야기

 

하몽(Jamón)
스페인 바에 들어서면 천장에서 하몽 다리가 줄줄이 매달려 있다. 돼지고기를 소금에 절여 오랜 시간 숙성시킨 것으로, 짭조름한 맛과 씹을수록 배어 나오는 고소한 풍미가 특징이다. 특히 도토리를 먹이고 키운 돼지로 만든 이베리코 하몽은 최고급. 입에 넣으면 녹듯이 부드럽고, 가격은 비싸지만 순례자들이 반드시 맛보는 음식이다.

빠에야(Paella)
빠에야는 발렌시아에서 유래한 스페인의 대표 쌀 요리다. 큰 팬(paellera)에 육수, 해산물, 고기, 채소를 넣고 생쌀과 함께 조리한다. 한국인에게는 “해물탕에 생쌀을 넣어 국물과 함께 밥을 지은 요리”처럼 느껴진다. 스페인인들에게는 가족과 공동체의 상징적 음식이다. 까미노 길에서는 공동 저녁에서 큰 빠에야 팬을 둘러싸고 나누어 먹으며 “오늘은 잔칫날”이라고 말한다.

뿔뽀(Pulpo a la Gallega)
갈리시아 지방의 명물. 한국에서 문어는 탱글탱글하게 먹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스페인에서는 푹 삶아내어 부드럽게 만든다. 올리브 오일, 굵은 소금, 파프리카 가루를 뿌려내는 단순한 방식이지만,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 맛이 일품이다. 멜리데(Melide)는 뿔뽀로 유명한 마을. 식당 앞에는 한국어 안내판까지 있을 정도로 한국 순례자들의 필수 방문지다.

타파스(Tapas)
작은 접시 위에 담긴 음식들. 이름의 유래는 술잔을 덮던 작은 빵이나 음식에서 시작되었다. 지금은 치즈, 하몽, 해산물, 올리브, 채소 볶음, 감자튀김 등 온갖 재료가 타파스가 될 수 있다. 빵 조각 위에 올려 나오는 경우가 많아, 한국 순례자들은 “작은 빵 위의 무궁무진한 안주”로 기억한다. 바에서 타파스 한 접시를 나누다 보면, 옆자리 낯선 순례자와도 금세 대화가 시작된다.

 

 

 

순례자들의 식탁 – 희노애락이 뒤섞인 이야기

 

순례자 식탁은 그날의 웃음과 눈물이 교차하는 무대다.

어떤 날은 와인을 무료로 마실 수 있어 모두가 잔을 부딪히며 크게 웃는다. 프랑스에서 온 노부부는 빠에야를 나누며 “오늘 우리는 가족이다”라고 말한다. 한국 청년은 뿔뽀를 처음 먹고 “이건 문어라기보다 버터 같다”고 감탄한다. 일본 순례자는 와인잔을 들고 “내일은 더 빨리 걸을 거야”라고 장담하지만, 다음날 늦잠을 자서 모두의 웃음을 산다. 독일 여성은 타파스 접시 앞에서 한국 순례자와 대화를 나누며 평생 친구가 되었다. 어떤 날은 아르헨티나 여성 순례자가 남편을 잃은 슬픔을 고백하며 눈물을 흘리자, 식탁에 있던 모두가 손을 잡아주었다.

식탁 위에서는 국적도 언어도 사라지고, 오직 순례자라는 이름만 남는다.

 

웃음과 취기, 그리고 따뜻한 위로

 

까미노 식탁에는 와인 덕분에 웃음이 많다. 와인병이 공짜로 제공되니, 순례자들은 서슴없이 잔을 채운다. 하루 종일 걸은 피로에 와인의 취기가 더해지면, 어느새 분위기는 한층 화기애애해진다. 누군가는 노래를 부르고, 누군가는 내일의 꿈을 이야기한다. 때로는 과음으로 다음 날 발걸음이 느려지기도 하지만, 그것조차도 웃음이 되고 추억이 된다.

 

에필로그 – 까미노의 식탁이 가르쳐 준 것

 

까미노의 식탁은 단순한 음식 자리가 아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당연한 것은 없다”는 것을 배운다. 물 한 잔조차도, 와인 한 잔조차도 다른 나라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작은 음식이 모여 하루를 채우고, 와인잔이 모여 마음을 이어준다. 결국 까미노의 식탁은 작은 음식, 큰 나눔의 공간이다. 그리고 순례자들은 산티아고 대성당 앞에 도착할 때 이렇게 고백한다.

“길 위의 모든 순간이 소중했지만, 가장 따뜻했던 건 함께 나눈 식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