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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발자국 – Camino Journal》 Day 5. 오리손에서 론세스바예스로

joyskim 2025. 9. 12.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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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손의 아침과 첫 발걸음

 

오리손 알베르게의 아침은 이른 새벽부터 분주하다. 좁은 도미토리 안에서 알람 소리가 여기저기 울리고, 아직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창밖으로는 차가운 산바람이 스며든다. 전날 저녁의 시끌벅적한 저녁식사와 건배의 여운은 사라지고, 이제는 모두가 긴장된 얼굴로 짐을 꾸린다.


오늘 하루는 프랑스 길 전체에서 가장 험난하고도 상징적인 날 ―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땅에 들어가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배낭을 어깨에 걸치는 순간, 어제보다 무겁게 느껴진다. 단지 10킬로그램 남짓의 짐인데, 오늘은 그 무게가 훨씬 크게 다가온다. 긴 하루에 대한 두려움, 날씨에 대한 불안, 체력에 대한 의문이 모두 짐의 무게에 더해지는 듯하다. 그러나 이 길 위에서는 누구도 그 무게를 대신 들어줄 수 없다. 오직 자기의 어깨, 자기의 두 다리로만 감당해야 한다.

 

 

 

오리손을 나서자 곧장 오르막이 시작된다. 경사 자체는 급하지 않지만, 아침 공기가 차고 숨이 차오르며 몸이 천천히 깨어난다. 뒤돌아보면 생장피드포르가 있던 계곡은 아득히 아래로 가라앉아 있다. 빨간 지붕과 돌담의 작은 마을은 이미 저 멀리 점으로 보일 뿐이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나는 왜 여기에 왔는가"라는 질문이 다시금 떠오른다. 회사에서 보낸 수십 년, 그 속에서 느낀 영광과 회한, 그리고 퇴직 후의 공허함. 이 모든 것이 이 길 위에서 정리되길 바라며, 오늘의 한 걸음을 내딛는다.

 

산길 위의 성모상, 만남과 회상

오리손을 떠난 지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길은 점점 숲에서 풀밭과 바위 지대로 모습을 바꾼다. 산등성이로 향하는 길은 완만하지만 끊임없이 이어져 있어 호흡이 거칠어지고, 배낭 끈이 어깨를 파고든다. 발목까지 오는 등산화는 단단히 묶였지만, 자꾸만 땀이 차서 답답하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오늘 하루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속으로 흘러나온다.

길 위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있다. 스페인 북부에서 왔다는 젊은 청년은 기타를 메고 천천히 노래를 흥얼거리며 걷는다. 미국에서 온 노부부는 서로의 보폭을 맞추느라 애를 쓰고 있다. 한국에서 온 또 다른 부부와는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국에서 여기까지 오셨군요?”라는 인사로 시작된 짧은 대화는, 서로가 짊어진 배낭의 무게와 마음의 무게가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게 해주었다.

 

잠시 후 길모퉁이를 돌자 ‘비아코리의 성모상(La Vierge de Biakorri)’이 나타난다. 바람에 세차게 흔들리는 초라한 작은 십자가와 그 앞에 세워진 성모상은, 수많은 순례자들이 무사히 이 고개를 넘길 기도와 희망을 담아 세운 것이리라. 성모상 앞에는 순례자들이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숨을 고른다. 어떤 이는 십자가 앞에서 묵묵히 손을 모으고, 어떤 이는 카메라로 이 순간을 기록한다. 나 또한 성모상 앞에 서서 조용히 기도한다. “오늘 하루, 이 길 위에서 나와 아내의 발걸음을 지켜주소서.”

 

 

 

길은 점점 더 넓은 초원으로 열리고, 사방에 양 떼가 흩어져 있다. 방울을 단 양들이 종소리를 내며 풀을 뜯는 풍경은 한 폭의 그림 같다. 그러나 풍경의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내 어깨는 점점 무거워지고 허리는 뻐근해진다. 이때 문득 떠오르는 것은 지난 세월의 기억들이다. 회사에서의 긴장된 보고, 무수한 회의, 끝없는 야근…. 그 모든 것들이 이 무거운 배낭처럼 나를 짓눌렀던 것이 아닐까? 지금 내 어깨를 짓누르는 것은 단순한 짐이 아니라, 내 인생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아내는 내 옆에서 묵묵히 걸음을 옮긴다. 땀방울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지만, 불평 한마디 없이 발걸음을 내딛는 모습이 오히려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나는 늘 회사와 일 때문에 가정에 소홀했는데, 이 길 위에서는 아내와 나 둘뿐이다. 그녀의 발걸음이 곧 나의 발걸음이다. 언젠가 딸들이 말하던 “엄마 덕분에 우리 집이 굴러간 거예요”라는 말이 떠올라 마음이 저릿해진다.

 

산의 공기는 점점 더 거세지고, 구름이 발밑에서 피어오르는 듯하다. 여전히 갈 길은 멀지만, 이 순간만큼은 내 삶이 새로운 장면으로 넘어가고 있음을 실감한다. 오늘의 한 걸음이 내 인생의 또 다른 시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레포데르 고개, 국경을 넘어

비아코리 성모상을 지나 다시 한참을 오르니, 길은 드디어 나무가 드문드문한 고산 초원으로 이어졌다. 초록빛 능선이 끝없이 펼쳐지고, 발아래에는 흰 구름이 바다처럼 부유한다. 마치 내가 하늘 위를 걷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러나 이곳은 착각이 아닌 현실이었다. 까미노 순례길의 가장 상징적인 구간 중 하나, 레포데르(Lepoeder) 고개가 눈앞에 다가온 것이다.

이곳은 순례자들이 스페인 땅을 처음 밟는 순간이자, 긴 여정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관문이다. 오리손에서의 4km 오르막이 연습이라면, 여기서부터는 진짜 여정의 첫 장이 열린다.

 

 

 

고개에 오르기 직전, 바람은 갑자기 세차게 불어온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지 않으면 날아갈 정도다. 아내는 작은 체구라 바람에 흔들리듯 걷지만, 꿋꿋하게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런 그녀를 보며 다시금 마음속 질문이 올라온다. “나는 왜 이곳에 서 있는가? 무엇을 얻고자 이 무거운 길을 택했는가?”

내 안의 대답은 단순했다. 살아온 세월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싶어서. 회사에서의 책임, 가정에서의 역할, 사회에서의 체면…. 그 모든 짐을 내려놓고, 단지 한 사람으로서의 나를 찾고 싶어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내 어깨 위에는 가장 무거운 배낭이 얹혀 있다. 그것이 어쩌면 이 여정의 본질일 것이다. 내려놓음은 결코 가벼움만이 아니라, 무거움 속에서 깨닫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고개 위에는 여러 나라에서 온 순례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간식을 나누거나 사진을 찍고 있다. 독일인 청년이 내게 과일을 건네며 “Buen Camino!”라고 외친다. 낯선 이의 짧은 인사가 이렇게 깊은 위로가 될 줄이야. 나도 웃으며 화답했다. “Buen Camino!”

레포데르를 넘어가자 풍경은 전혀 달라진다. 프랑스의 부드러운 초원은 어느새 사라지고, 스페인의 숲과 계곡이 펼쳐진다. 길은 가파른 내리막으로 바뀌고, 무릎에 충격이 전해진다. 내려가는 길 곳곳에는 작은 샘물이 흘러나와 순례자들의 목을 축여준다. 나는 손바닥에 물을 받아 마시며 속으로 되뇌었다. “드디어 스페인이다. 드디어 진짜 순례길이 시작되었다.”

 

론세스바예스의 밤

가파른 내리막을 몇 시간 내려오니 드디어 숲 사이로 커다란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론세스바예스 수도원 알베르게다. 순례자들의 첫날 긴 여정을 받아주는 상징적인 공간. 피레네를 넘어온 수많은 이들의 발자국이 이곳에 쌓여 있다.

 

 

 

알베르게 문을 들어서자, 관리자가 환한 미소로 우리를 맞아준다. 이름을 적고, 아침에 생장에서 받은 크레덴셜에 첫 스탬프가 찍히는 순간, 마치 나의 순례가 비로소 공식적으로 시작된 듯한 떨림이 전해졌다. 단순한 도장이지만, 그 속에는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전통과 영성이 담겨 있는 듯했다.

숙소 내부는 커다란 체육관을 연상케 한다. 100명 넘는 순례자가 한 공간에 침대를 나란히 두고 머무는 곳.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사라지지만, 대신 이곳에서는 모두가 ‘순례자’라는 동일한 이름으로 묶인다. 한쪽에서는 한국인 청년이, 다른 쪽에서는 스페인 중년 부부가, 또 다른 곳에서는 독일에서 온 노부부가 각자 짐을 풀고 있다. 언어는 달라도 서로에게 미소를 건네며 “Buen Camino!”라는 인사를 나눈다. 그 말 한마디가 서로를 낯설지 않게 해준다.

 

 

 

저녁 시간, 알베르게 식당은 하나의 대형 연회장으로 변한다. 긴 테이블에 순례자들이 빼곡히 앉아 국을 퍼 나르고, 빵을 나누며, 와인잔을 부딪힌다. 프랑스인, 일본인, 캐나다인, 한국인… 국적은 다르지만 모두가 같은 길을 걸어온 이웃이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어디서 왔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모두가 하나의 식구다.

식사가 끝난 뒤, 성당에서 순례자 미사가 열린다. 고요한 성가와 함께 각국의 언어로 축복의 기도가 울려 퍼진다. 신앙이 있든 없든, 그 순간의 경건함은 누구에게나 깊은 울림을 준다. 특히 마지막에 신부님이 순례자들을 앞으로 불러내어 한 명 한 명 이마에 십자가를 그리며 축복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 길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걷는 길이구나’라는 깨달음이 밀려왔다.

 

 

밤이 깊어가고, 알베르게의 불이 꺼진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의 뒤섞인 코골이, 기침, 뒤척임 소리로 잠은 쉽게 오지 않는다. 그래도 괜찮았다. 피로에 젖은 몸이 침대에 눌러앉으며 속삭였다. “이것이 순례길의 첫날밤이다. 드디어 나는 순례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