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바이욘역의 긴장된 공기
아침 일찍 바이욘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역 앞 광장에는 이미 여러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단순한 여행객의 모습이 아니라, 대부분 배낭을 멘 순례자들이었다. 각자 다른 나라에서 왔지만 그들의 옷차림과 눈빛은 하나의 공통된 긴장과 설렘으로 묶여 있었다. 나와 아내도 무거운 배낭을 등에 지고 서 있었는데, 순간 “이제는 정말 시작이구나”라는 실감이 밀려왔다.
역사 내부는 소박했지만 붐볐다. 매표소 근처에는 순례자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기차 대신 순례자 전용 버스가 생장피드포르까지 운행된다고 했다. 이 작은 변화 하나에도, 나는 ‘내가 지금 특별한 여정에 서 있구나’라는 묘한 자각을 했다.
버스에 올라, 생장으로 향하다
버스 안은 이미 순례자들로 가득했다. 독일에서 왔다는 중년 부부, 캐나다에서 온 젊은 대학생들, 일본인 여성 순례자, 그리고 우리와 같은 한국인 부부도 보였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흥미로웠다. 모두의 얼굴에 긴장과 설렘, 그리고 약간의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버스는 출발하자마자 곧장 시골길로 접어들었다. 창밖으로는 프랑스 남부의 봄 풍경이 펼쳐졌다. 4월의 들판은 초록빛이 농익어 있었고, 밀들이 바람에 따라 물결처럼 일렁였다. 그 사이사이로 점점이 놓인 붉은 지붕의 마을들, 흐르는 개울과 다리를 건너는 소떼와 양떼의 모습은 목가적 풍경 그 자체였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가 왜 여기까지 왔을까?” 회사에서 퇴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수십 년을 기획실에서 숫자와 보고서에 묻혀 살았고, 가족은 늘 뒤로 미뤘다. 이제야 아내와 함께 걸을 시간을 얻었지만, 그 무게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오늘 하루 종일 메고 있는 배낭은 단순한 짐이 아니라, 나의 지난 세월의 무게처럼 어깨를 짓눌렀다.
생장피드포르, 순례의 문턱
정오쯤, 버스는 피레네산맥 자락 깊숙이 자리한 생장피드포르에 도착했다. 생장피드포르는 프랑스 남서쪽, 바스크 지방의 깊은 골짜기에 자리한 작은 도시이다.. 이름 그대로 “산(피레네)의 발치에 있는 요새 도시”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12세기 무렵부터 산티아고 순례길(프랑스 길, Camino Francés)의 출발점으로 자리매김해왔다.. 고대에는 나바라 왕국의 요충지였고, 지금도 중세의 성문과 성벽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성문 중 하나인 “포르트 생자크(Port de St-Jacques)”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되어 있어, 모든 순례자들이 반드시 통과하는 상징적인 관문이다. 마을 입구에서 보이는 풍경은 고풍스러웠다. 붉은 지붕과 벽돌 건물이 강 양옆으로 늘어서 있고, 그 가운데 다리 하나가 고요히 걸려 있었다. 그 다리를 건너는 순간, 마치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곳은 산티아고 순례길의 공식 출발점이자,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순례자들이 첫 발을 내디딘 곳이다. 그 역사를 떠올리자 나의 발걸음마저 엄숙해졌다.
순례자 사무소 – 크레덴셜의 의미
생장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순례자 사무소에는 이미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유럽 전역은 물론, 아시아, 미주에서 온 사람들까지 각양각색의 얼굴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작은 사무실 안에서는 자원봉사자들이 친절하게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크레덴셜(Credential), 즉 순례자 증명서를 발급받는 일이다. 이 증명서는 단순한 종이가 아니다. 앞으로 순례길을 걸으며 들르는 숙소, 교회, 카페, 심지어 작은 상점까지도 여기에 스탬프를 찍어준다. 그 도장 하나하나가 내가 실제로 걸었다는 증거가 되고, 최종적으로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했을 때 완주 증명서를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줄을 서 있는 동안, 나는 아내의 얼굴을 흘끗 보았다. 그녀는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순간이 온 듯 눈빛이 반짝였다. 배낭 때문에 힘들어하면서도, 이 길이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인생의 또 다른 장이라는 사실을 온전히 느끼는 듯했다.
강가 카페에서의 짧은 휴식
사무소를 나온 뒤, 우리는 강가에 있는 작은 카페에 들렀다. 붉은 지붕 집들이 줄지어 늘어선 사이로 흐르는 강, 그리고 다리 위를 오가는 순례자들의 모습이 그림 같았다. 의자에 앉아 커피 한 잔을 시켰다. 커피 맛은 특별히 뛰어나지 않았지만, 그 순간의 공기와 풍경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나는 커피를 마시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왜 여기에 왔는가?” 지난날의 회사 생활, 가정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퇴직 후 찾아온 허무함. 모든 것이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이유를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내가 여기 있는 이유는, 단순히 걸음을 옮기기 위함이 아니라, 잊고 있던 나 자신을 다시 찾기 위함이라는 것.
아내도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여보, 여긴 참 좋네요. 여기까지 오길 잘했어요.”
그 말 한마디에, 무거웠던 배낭이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
오리손으로 향하는 길
생장피드포르에서 순례자 사무소를 나와 강가 카페에서 짧은 휴식을 취한 뒤, 우리는 곧 오리손으로 향하는 길을 잡았다. 오리손까지는 약 4km, 내일 넘을 피레네 산맥을 생각하면서 내일의 힘든 시간들을 좀 줄여보자고 오늘 시간이 될때 먼저 조금이라도 더 걷자라는 생각으로 생장에서 안자고 오리손에 숙박을 잡은 것이다. 짧은 거리였지만 이 길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었다. 오늘 처음으로 제대로 배낭을 메고 걷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배낭은 분명 10kg 남짓일 뿐인데, 그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다. 아직 몸이 이 길에 익숙해지지 못했기에 평소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다. 가파른 산길은 아니었지만, 꾸준히 이어지는 완만한 오르막은 초보 순례자에게 충분히 벅찼다. 이쯤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왜 이 길에 왔는가?”
내 삶의 대부분을 회사와 일에 바쳐온 지난 세월, 은퇴 이후 찾아온 허무함, 그리고 아내와의 관계 속에 쌓여 있던 미안함…. 그 모든 것들을 배낭에 담아 짊어진 듯했다. 아내 역시 묵묵히 내 옆에서 걸었는데, 순간적으로 ‘과연 내일 저 험한 피레네를 아내가 잘 넘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엄습했다.
길가에는 이따금 작은 농가가 나타났다. 붉은 기와와 흰 벽이 어우러진 바스크식 집들이 언덕에 박혀 있었고, 울타리 안에는 양떼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한 무리의 순례자들이 우리를 앞질러 가며 “Buen Camino!” 하고 인사를 건넸다. 그 짧은 인사 한마디가, 서로에게 ‘당신도 나와 같은 길 위에 있구나’라는 동질감을 전해주었다.
오리손 알베르게의 밤
오리손 알베르게는 길가에 자리 잡은 소박한 건물이었다. 붉은 벽돌집의 외관은 투박했지만, 그 앞마당은 작은 노천카페처럼 꾸며져 있었다. 벌써 몇몇 순례자들이 테이블에 앉아 맥주나 커피를 즐기며 서로의 여정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스페인어와 영어, 프랑스어가 뒤섞여 흘러나오는 활기찬 소리가 공기를 채우고 있었다.
체크인을 마치고 배정받은 침실로 들어가 보니, 낯선 이들과 나란히 누워야 하는 도미토리 형식이었다. 침대는 2층으로 된 간이 침대였고, 사방에서 들려오는 잡다한 소리에 일찌감치 긴장감이 돌았다.
저녁식사는 알베르게가 준비한 공동 만찬이었다. 국적도, 언어도 다른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앉아 긴 테이블을 채웠다. 누군가는 와인을 돌리고, 누군가는 빵을 나누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나눈 짧은 대화 속에서도, 모두가 같은 목적지―산티아고―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 묘한 유대감을 형성했다. 그 자리에서 건배 제의가 나왔다.
“Buen Camino!”
순간 모두의 목소리가 하나가 되었고, 나는 왠지 모르게 울컥했다.
식사 후에는 순례자들이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했다. 한 젊은이는 “삶의 전환점을 찾기 위해 이 길에 왔다”고 했고, 어떤 여성은 “사별한 남편을 기리기 위해 걷고 있다”고 했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까미노는 단순한 하이킹이 아니라 삶의 무게를 풀어내는 치유의 길이라는 것을 절감했다.
밤이 깊자, 도미토리 안은 코 고는 소리와 뒤척임으로 가득했다.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 쉽게 잠들 수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불편함마저 이 길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피곤했지만, 내일 드디어 피레네 산맥을 넘는다는 기대와 긴장감이 가슴을 뛰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