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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미노 길 위의 풍경] “고개를 넘는 순간 보이는 넓은 벌판 – 놀라움의 연속”

joyskim 2025. 8. 20.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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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넘는다는 것의 의미

까미노의 길에는 수많은 고개들이 있습니다. 작은 언덕도 있고, 피레네처럼 거대한 산줄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순례자들에게 고개를 넘는 경험은 단순히 지형을 통과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이 지고 있던 무게를 시험하고, 그 끝에서 새로운 세계와 맞닥뜨리는 과정입니다.

저 역시 수차례 고개를 넘으면서 깨달았습니다. 고개란 늘 불안과 기대가 동시에 존재하는 공간입니다. 땀으로 얼룩진 셔츠가 등을 파고들 때, 다리에 근육통이 차오를 때, 마음속에서는 “언제쯤 끝날까”라는 조바심이 올라옵니다. 하지만 발걸음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고개를 넘는다는 건 곧 스스로와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오르막의 시작 – 무거운 발걸음, 그리고 침묵

순례자들이 고개에 다가서면 누구나 말수가 줄어듭니다. 서로 농담을 주고받던 무리도 어느 순간 조용해지고, 각자 호흡에 집중하게 됩니다. 땅은 점점 가팔라지고, 배낭의 무게는 두 배로 느껴집니다.
저 앞에서 걷던 이탈리아 순례자 로베르토(51)는 땀을 훔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늘 오르막에서 찾아오죠. 힘든 만큼 얻는 것도 크니까요.”

그의 말처럼 오르막은 단순히 풍경을 바꾸는 과정이 아니라, 내 안의 의지를 시험하는 자리입니다.

 


 

시야가 열리는 순간 – 숨이 멎는 경험

 

마침내 정상에 오르자, 저를 짓누르던 무게가 한순간에 사라졌습니다. 고개 너머로 펼쳐진 풍경은 숨을 멎게 했습니다.
멀리 끝없이 이어진 황금빛 벌판, 마치 바다처럼 출렁이는 밀밭, 길게 뻗은 흙길 위로 점처럼 움직이는 순례자들의 행렬. 바람은 얼굴을 스치며 “환영한다”고 속삭이는 듯했고, 새들이 푸른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갔습니다. 그 순간 저는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에 빠졌습니다.


순례자들은 서로 눈을 마주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침묵은 오히려 더 큰 언어가 되었습니다. 그 침묵 속에서 우리 모두는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고개 너머의 감정

 

루이스(멕시코, 29세)
“나는 평생 도시에서만 살았어요. 늘 건물과 차 사이에서 숨이 막히듯 살았죠. 그런데 고개를 넘자마자 펼쳐진 이 풍경은… 자유 그 자체였어요. 내가 진짜 살아 있다는 걸 처음 느꼈습니다.”

 

아야(일본, 34세)
“고개를 넘는 순간, 눈물이 났어요. 지금까지는 내가 혼자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넓은 벌판을 보니 ‘나는 연결되어 있구나’라는 느낌이 왔습니다. 나보다 앞서 걸어간 순례자들, 지금 이 순간 함께하는 사람들, 그리고 앞으로 이 길을 걸을 수많은 사람들 모두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요.”

 

마리아(독일, 56세)
“젊었을 때 큰 병을 앓았어요. 다시는 먼 길을 걷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고개를 넘었네요. 저 앞에 펼쳐진 벌판을 보는 순간, 내 삶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걸 알았습니다.”


고개 위에서 만난 바람

저는 한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했습니다. 고개 위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단순한 바람이 아니었습니다. 그 바람은 저에게 과거의 기억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보여주었습니다.


“너는 참 많은 고개를 넘어왔구나.”


그 속삭임은 제게 위로이자 격려였습니다. 눈앞의 풍경이 아니라 마음속 풍경이 열리는 순간, 저는 깨달았습니다. 까미노는 길 위의 여행이자 마음의 여행이라는 사실을.


고개를 넘은 뒤 – 다시 시작되는 발걸음

놀라움에 잠시 멈춰 서 있다가도, 결국 발걸음은 다시 이어집니다. 길은 계속 이어져 있고, 순례는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 이후의 걸음은 전과 다릅니다. 더 가볍고, 더 단단합니다.
저는 곧게 뻗은 길 위로 발을 내딛으며 스스로에게 속삭였습니다.


“이 길 끝에서 어떤 풍경이 날 기다리고 있을까?”
그 기대감이 저를 다시 움직이게 했습니다.


인생의 고개 너머

우리는 모두 인생에서 수많은 고개를 만납니다. 그 고개는 때로는 시련이고, 때로는 선택이며, 때로는 용기를 요구하는 순간입니다. 하지만 까미노가 가르쳐 준 건 분명합니다.


고개를 넘지 않고서는, 그 너머의 풍경을 결코 만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 풍경은 언제나 놀라움으로 우리를 맞이한다는 것.

 

그래서 오늘도 수많은 순례자들은 고개를 오릅니다. 땀과 눈물, 웃음을 짊어진 채. 그리고 고개를 넘는 순간, 세상이 바뀌었다는 듯 또 다른 자신을 만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