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까미노 길 위의 풍경] 순례길을 걷는 다양한 모습

joyskim 2025. 8. 17. 16:52
반응형

 

프롤로그 – 순례길의 수많은 발걸음

 

스페인의 대지를 가로지르는 까미노, 이 길을 걷다 보면 누구도 똑같은 발걸음을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금세 알게 된다. 누군가는 묵직한 배낭을 지고 묵묵히 두 발로만 길을 밟아 나가고, 누군가는 작은 수레를 끌며 더딘 걸음을 이어간다. 또 어떤 이는 자전거로, 혹은 말 위에 앉아 과거의 기사처럼 순례를 이어가고, 때로는 버스와 걷기를 병행하며 현실적인 이유로 자신의 길을 완성하는 이들도 있다.

 

이 풍경은 마치 인생을 비추는 은유와도 같다. 살아가는 방식이 저마다 다르듯, 순례길 또한 “하나의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길을 어떻게 걸었는가가 아니라, 왜 그 길 위에 섰는가 하는 질문이다.

 

내가 길 위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걸음을 이어가면서도, 하나의 공통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집중이었다. 두 발로 걷든, 자전거를 타든, 수레를 끌든, 심지어 버스에서 내려 잠시만 걷든 간에, 모든 순례자의 얼굴에는 “내가 이 길을 완성하겠다”는 의지가 배어 있었다.

 

길 위에서 만난 다양한 발걸음

한 번은 메세타 초입에서, 지팡이를 짚고 터벅터벅 걸어가는 노부부를 보았다. 옆에는 작은 손수레가 하나 달려 있었는데, 그 안에는 무릎 수술을 받은 아내가 앉아 있었다. 남편은 땀에 흠뻑 젖은 채 수레를 끌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고, 아내는 창백한 얼굴에도 불구하고 계속 “Gracias”를 속삭였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순례는 체력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크기의 문제라는 것을.  

 

 

 

또 다른 날, 부르고스 근처에서는 사이클복을 입은 무리의 순례자들을 만났다. 빠른 속도로 지나가며 서로에게 “Buen Camino!”를 외치던 그들은, 힘찬 페달링 속에서도 서로를 격려하며 살아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혼자 걷는 길”이라 여겨졌던 까미노를 “함께 달리는 여정”으로 바꿔 놓았다.

 

그리고 또 한 장면. 레온 근교의 어느 바에서는 버스로 이동해 온 듯한 순례자들을 봤다. 그들은 비교적 깨끗한 옷차림에 작은 배낭만을 메고 있었는데, 다른 순례자들에게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전부를 걸을 수는 없지만, 이 길 위에 서고 싶었습니다.”


그 진심 어린 말은 오히려 큰 울림을 주었다.

 

순례의 본질은 ‘방식’이 아니라 ‘의미’

처음 까미노에 올랐을 때 나는 “정통”이라는 것에 집착했었다. 끝까지 두 발로 걸어야만 진짜 순례라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길 위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 뒤, 내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 수레를 끌고 걷는 이에게는 헌신과 사랑이 있었다.
  • 자전거를 타는 이에게는 자유와 도전이 있었다.
  • 말을 타는 이에게는 전통과 낭만이 있었다.
  • 버스를 병행하는 이에게는 현실과 타협 속의 진심이 있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내가 왜 이 길에 서 있는지, 무엇을 찾으려 하는지라는 질문이었다. 까미노는 그 해답을 강요하지 않지만, 묵묵히 걷는 동안 차츰 자신만의 답을 내리게 한다.

 

프롤로그는 하나의 서막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서막을 여는 순간, 우리는 이미 깨닫게 된다.
“이 길 위에는 수많은 방식의 발걸음이 있고, 그 모든 방식은 다 옳다.”

순례길에서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길은 곧 내 삶을 돌아보는 시선이 된다. 나와 다른 방식을 택한 이들을 존중하는 순간, 나는 내 방식 또한 더 깊이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야말로 까미노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위대한 선물일지 모른다.

 

 

두 발로 걷는 이들 – 가장 전통적인 방식

 

 

 

까미노를 걷는 이들을 수없이 만나지만, 여전히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이들은 두 발로 묵묵히 걸어가는 전통적인 순례자들이다. “걸음”이라는 단순한 행위가 이 길에서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배낭 하나와 튼튼한 신발, 그리고 스스로의 체력에 의지해 매일 수십 킬로미터를 걸어내는 그 과정은 곧 자기 자신을 시험하는 의식이 된다.

 

순례길의 시작점, 프랑스 생장피드포르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땅으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발걸음은 무게를 가진다. 오르막의 헉헉거림, 내리막의 긴장, 그리고 장시간의 평지 걷기 속에서 다리는 점점 무거워지지만, 동시에 땅을 밟는 리듬은 점차 일상의 호흡처럼 편안해진다.

 

“두 발로만 걷는다는 건 결국 자기 자신과의 대화예요.”

 

독일에서 온 순례자 한스(42)는 말했다. 그는 회사를 그만둔 뒤, 매일 혼자 걸으며 앞으로의 삶을 정리하고 있었다.

 

“차를 타거나 자전거로 달리면 놓쳐버릴 것들을, 발로 걸으면 다 느낄 수 있어요. 흙냄새, 바람의 결, 사람들의 표정까지.”

 

발걸음에 새겨지는 고통과 보람

물론 두 발로만 걷는 이들에게는 고통도 따른다. 무릎 통증, 물집, 햇볕에 그을린 어깨, 피로로 인한 무기력… 이런 문제들은 순례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마주하는 벽이다. 스페인 부르고스 근처에서 만난 젊은 순례자 루시아(28, 이탈리아)는 웃으며 말했다.


“발뒤꿈치에 물집이 너무 심해서 하루는 그냥 벤치에 앉아 울었어요. 그런데 옆자리에 앉은 프랑스 아줌마가 자기 연고를 꺼내 발라주며 ‘괜찮아, 나도 매일 그래’라고 말해주더라고요. 그 순간 ‘혼자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다시 걸을 힘이 생겼어요.”

 

두 발로만 걷는 이들의 공통된 경험은, 육체의 고통 속에서 만나는 연대감이다. 고통은 오히려 서로를 연결하는 다리가 되고, 그 안에서 웃음과 위로가 싹튼다.

 

두 발이 주는 사유의 시간

또한 발걸음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내면을 들여다보는 도구가 된다. 하루 종일 이어지는 발의 리듬 속에서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고, 억눌려 있던 생각들이 서서히 떠오른다. 캐나다에서 온 순례자 미쉘(54)은 이렇게 회상했다.


“까미노를 걷기 전까지는 늘 바쁘게만 살았어요. 그런데 하루에 25km를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잡념이 사라지고 그냥 내 숨소리만 들려요. 그러다 오래 묵혀둔 기억이 불쑥 떠오르고, 오래전에 잊어버린 감정도 다시 느껴져요. 마치 걷는 발자국마다 마음속 먼지를 하나씩 털어내는 것 같아요.”

 

이렇듯 두 발로 걷는 것은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깊은 사유를 가능하게 한다. 자동차나 자전거로는 얻을 수 없는 느림의 시간, 그 속에서 다시금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순간들이 만들어진다.

 

전통을 이어가는 순례자들

중세 시대, 산티아고로 향하는 길을 걸었던 사람들도 바로 이 두 발에 의존했다. 당시에는 마차나 말을 타는 귀족들도 있었지만, 대다수 순례자들은 농민, 수도사,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지금의 순례자들이 두 발로 길을 걷는 이유는 단순하다. “옛 순례자들이 걸었던 방식으로, 나도 똑같이 걷고 싶다”는 마음.

 

한국에서 온 한 중년 순례자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원래 운동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데 이 길은 꼭 발로 걸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래야 옛날 사람들이 어떻게 이 길을 갔는지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버스도, 택시도 안 타고 하루에 20km씩 묵묵히 걸었습니다.”

 

이렇듯 두 발로 걷는 것은 단순한 이동의 방식이 아니라, 전통을 이어가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 그리고 역사와 자신을 잇는 상징적인 행위로 자리한다.

두 발이 남기는 흔적

수많은 방식의 순례가 존재하지만, 두 발로만 걷는 이들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특별하다. 발바닥에 남은 굳은살과 물집, 길가에 흘린 땀방울, 그리고 함께 걸었던 이들과의 나눔… 그것은 곧 순례길의 가장 원형적이고 본질적인 모습이다.

 

“끝까지 걷고 나면, 성당 앞에 선 내 발을 꼭 안아주고 싶어요.” 한 순례자가 웃으며 한 말은, 아마 두 발로 걷는 이들 모두의 진심일 것이다.

 

수레를 끌고 걷는 이들 – 아픔과 동행의 여정

까미노 길 위에는 두 발로 걸어가는 전통적인 순례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예상치 못한 아픔과 한계를 안고서도, 결코 길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곁에는 작고 투박한 수레가 함께 한다. 수레는 단순히 짐을 싣는 도구가 아니라, 아픔을 안아주는 동반자이며, 함께 걷는 이들의 사랑과 헌신을 상징한다.

 

수레에 실린 아픔과 용기

어느 날, 나는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메세타 평원 위에서 지팡이를 짚은 노부부를 보았다. 옆에는 작은 손수레가 하나 달려 있었는데, 그 안에는 무릎 수술을 받은 아내가 앉아 있었다. 남편은 땀에 흠뻑 젖은 채 천천히 수레를 끌었고, 아내는 창백한 얼굴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Gracias”를 속삭였다. 그 모습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함께 짊어지고 가는 인간 사랑의 극적인 장면이었다. 

 

아내의 눈빛에는 미안함과 감사가 동시에 담겨 있었다. 남편은 힘겨운 숨을 몰아쉬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까미노가 단순히 개인의 영적 여행이 아니라, ‘함께 걷는 여정’임을 이 부부는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순례자들의 작은 인터뷰

 

길 위에서 만난 또 다른 수레의 주인은  "라파엘(38, 브라질)"이었다. 그는 다리에 장애가 있어 긴 거리를 오래 걷기 힘들었지만, 친구들이 번갈아 가며 수레를 밀어주었다.

“저는 이 길을 혼자서는 결코 완주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제 곁에 있는 친구들은 제가 포기하지 않도록, 때로는 농담을 던지며, 때로는 노래를 부르며 함께 걸어줍니다. 까미노는 결국 제 발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으로 걸어가는 길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의 말은 길 위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진실이었다. 수레는 단순히 약한 이의 몸을 대신 운반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걷는 사람들의 연대와 우정, 그리고 공동체의 힘을 상징한다.

 

수레가 던지는 질문

수레와 함께 걷는 이들을 볼 때면, 우리 삶의 본질적인 질문과 맞닥뜨리게 된다. “나는 혼자만의 힘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그리고 또 하나, “누군가를 위해 내 어깨와 손을 내어줄 수 있을까?” 까미노의 길 위에서 수레는 인간의 한계와 동시에 연대의 가능성을 드러낸다.

길가의 작은 바에서 쉬던 한 순례자가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수레를 끌고 지나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제 마음이 울컥합니다. 까미노는 결국 우리 모두의 삶을 닮았어요. 때로는 내가 누군가를 끌고 가야 하고, 때로는 내가 실려야 할 때도 있겠죠.”

 

인간미로 가득한 길

수레를 끄는 모습은 단순히 ‘불편한 방식의 순례’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길 위에서 가장 진한 인간미를 드러내는 장면이다. 힘겹게 땀을 흘리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는 모습, 아픔을 함께 감싸 안는 모습, 낯선 이들이 모여 수레를 대신 밀어주는 모습… 이 모든 것들이 모여 까미노를 특별한 길로 만든다.

 

그 길을 걷는 동안, 나는 수레가 결코 무거움의 상징이 아니라, 사랑과 동행의 증거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각자 다른 모양의 수레를 끌며 살아간다. 중요한 건 그 수레가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그 수레를 끌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자전거 순례자들 – 속도와 자유 사이에서

두 바퀴 위의 순례

까미노를 걷다 보면 두 발로 길을 내딛는 이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먼지 나는 길 위로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자전거 무리들을 종종 만난다. 그들의 모습은 늘 상쾌하면서도 자유롭다. ‘바이시클로(Bicigrinos)’라 불리는 이 자전거 순례자들은 속도를 통해 다른 방식으로 길을 체험한다. 하루에 수십 킬로미터를 달릴 수 있기에 걷는 이들보다 훨씬 짧은 시간 안에 산티아고에 도착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속도 속에도 각자의 고유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자유를 만끽하는 젊은 순례자들

나는 나바라 구릉지대를 지날 때  "미구엘(27, 스페인)"이라는 청년 자전거 순례자를 만났다. 땀에 젖은 얼굴이었지만 눈빛은 자유로움으로 빛나고 있었다.

“저는 도시의 빠른 삶에 익숙해 있었어요. 그래서 까미노도 제 방식대로 경험하고 싶었습니다. 바람을 가르며 달리다 보면 마치 제 몸과 마음이 동시에 해방되는 것 같아요. 두 발로 걸으면 볼 수 없는 풍경도 있고, 더 넓은 세상을 단숨에 만나는 기분이 듭니다.”

 

그는 잠시 멈춰 물을 마시며, 여전히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교류가 자전거 순례의 가장 큰 기쁨이라고 말했다. 속도를 낸다고 해서 인간적인 만남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전거가 연결의 매개가 되기도 했다.

 

한국 아줌마 자전거 동호회 – 힘차게 달린 우정의 행렬

 

내가 까미노에서 가장 강렬하게 기억하는 장면 중 하나는 알록달록한 헬멧과 통일된 유니폼을 입은 한국 아줌마 자전거 동호회였다. 그들은 10여 명이 한 줄로 도로를 달리며 스페인의 평야를 가로질렀다. 풍경이 그들 덕분에 한층 더 활기차게 변해버린 듯했다.

 

인터뷰를 요청하자 대표 이정숙(58) 씨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끼리 농담처럼 ‘은퇴하면 까미노를 달려보자’고 했는데, 정말로 모여서 오게 됐습니다. 남편들보다 우리 우정이 더 끈끈해요.”

 

그들은 매일 아침 자전거에 오르기 전 “파이팅!”을 외치며 서로의 어깨를 두드렸다. 오르막길에서는 앞사람이 뒤를 기다려주고, 내리막에서는 뒤에서 안전하게 지켜주었다.

 

길가의 스페인 아이들은 환호하며 손을 흔들었고, 아줌마들은 멈춰서 과자를 나눠주기도 했다. 현지 언론 기자가 이들의 행렬을 취재할 정도로 눈길을 끌었다. 한 현지인은 “그들의 에너지는 마치 하나의 축제 같다”고 말했다.

 

아줌마들의 까미노는 단순히 체력의 도전이 아니라 “우정의 순례”였다. 그들은 말한다.

“이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우리는 이미 서로와 함께 이 길을 걷고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이 장면은 까미노가 한국 여성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것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인생 2막을 여는 뜨거운 연대의 경험이었다.

 

 

 

도전과 고난의 연속

 

하지만 자전거 순례가 늘 자유와 속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피레네 산맥의 가파른 오르막길에서는 페달이 무겁게 느껴지고, 자갈길에서는 중심을 잃기 쉽다.
"사라(33, 이탈리아)"는 이렇게 털어놓았다.

“내리막길은 정말 짜릿했어요. 하지만 비 오는 날 젖은 흙길을 달릴 때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결국 자전거 순례는 체력뿐 아니라 두려움과 맞서는 용기도 필요해요.”

 

그녀는 넘어져 무릎에 상처가 난 뒤 현지 순례자 숙소에서 도움을 받았던 경험을 이야기했다. 자전거 순례자들이 늘 혼자만의 속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길 위에서 서로 도우며 이어가는 연대감은 두 발 순례자들과 다르지 않았다.

 

 

속도와 여유 사이

 

자전거 순례자들은 걷는 이들보다 더 많은 풍경을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잠시 멈추어 커피를 마시고, 길 위의 작은 성당에 들르며, 걷는 이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빠름과 느림이 조화되는 그 순간, 자전거 순례는 단순한 속도의 여행이 아니라 또 하나의 방식의 영적 체험이 된다.

어떤 순례자가 이런 말을 남겼다.

“자전거로 달리면 시간은 빨라지지만, 마음은 오히려 깊어져요. 페달을 밟으며 흐르는 바람이 제 삶의 무거운 짐을 하나하나 벗겨내는 것 같거든요.”

 

두 바퀴로 새긴 흔적

까미노는 수백 년 동안 ‘걷는 길’로 불려왔지만, 자전거 순례자들 또한 그 길 위에 자신들만의 발자취를 남긴다. 바퀴 자국이 흙길에 새겨질 때, 그것은 또 다른 순례의 기록이 된다. 걷는 이들과 달리는 이들이 함께 어울려 만들어내는 풍경 속에서, 까미노는 단순히 전통을 지키는 길이 아니라, 새로운 해석을 품어내는 살아있는 길임을 확인하게 된다.

 

 

말을 타고 걷는 이들 – 옛 순례의 재현

까미노의 길을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낯선 소리에 귀가 번쩍 뜨인다. 그것은 신발 밑창이 흙길을 밟는 ‘사각사각’ 소리가 아니라, “탁, 탁, 탁” 울리는 말발굽 소리다. 구름처럼 일렁이는 초원 너머에서 말을 탄 순례자가 나타날 때, 길 위의 시간은 잠시 과거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준다.

말과 함께한 중세의 그림자

순례의 역사는 단지 인간의 두 다리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중세 문헌과 벽화, 그리고 산티아고 대성당의 석조 부조에는 말을 타고 순례하는 사람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당대 귀족이나 기사 계급, 혹은 먼 거리를 빠르게 이동해야 했던 순례자들은 말과 함께 길을 걸었다. 오늘날 말을 타고 까미노를 걷는 사람들은 단순히 편리함 때문만은 아니다. “역사 속의 길을 몸소 재현한다”는 상징적 의미가 더 크다.

 

카를로스와 그의 말, 루시아

 

레온 근교의 작은 길목에서 만난 카를로스(47, 스페인)는 조그만 백마 ‘루시아’와 함께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는 짐을 모두 말등에 싣지 않고, 일부러 자신도 함께 무거운 배낭을 멨다. 인터뷰를 청하자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말에게 모든 짐을 맡기는 건 제 순례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제 몫을 지고, 루시아는 제 친구로 함께 하는 겁니다.”

저녁이 되면 카를로스는 말에게 사료를 챙겨주고, 솔로 털을 빗겨주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는 덧붙였다.

“말과 함께 걸으면 제 숨결과 심장이 그대로 전달돼요. 제가 지치면 녀석도 속도를 늦추고, 제가 기뻐하면 고개를 흔들며 반응합니다. 이 길은 결국 우리 둘의 이야기이자 동행의 기록입니다.”

 

말과 함께 걷는 이들은 까미노에 색다른 풍경을 남긴다. 순례자들은 그들을 보며 중세 기사단을 떠올리고, 현지인들은 오래된 전통이 살아 숨 쉬는 듯한 감동을 받는다.

 

 

버스를 병행하는 이들 – 현실과 타협한 순례

순례의 길이 언제나 순수한 걷기만으로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메세타의 끝없는 평야, 발바닥의 물집, 한계에 다다른 체력은 종종 순례자들에게 ‘타협’을 요구한다. 바로 버스를 이용하는 것이다. 일부 순례자들은 전체 길의 일정 부분만 걸으며 나머지는 버스로 이동한다. 어떤 이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이고, 또 어떤 이는 부상으로 인해 더 이상 발걸음을 이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부르고스에서 만난 루이스(61, 아르헨티나)는 허리를 삐끗해 며칠을 버스로 이동해야 했다.

 

그는,

“처음엔 자책감이 컸다. ‘나는 진정한 순례자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나 길 위의 동료들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이렇게 말했다. ‘중요한 건 네가 아직 여기 있다는 거야.’ 그 말을 듣고 위로받았다”고 했다.

 

그는 회복 후 다시 걷기 시작했고, 오히려 버스로 이동한 기간이 있었기에 몸이 회복돼 완주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순례길에는 “걷지 않은 순례는 진짜가 아니다”라는 의견과 “어떤 방식이든 이 길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의견이 공존한다. 그러나 실제로 버스를 병행하는 이들을 만난 많은 순례자들은 그들의 사정을 듣고는 오히려 공감과 이해를 보였다. 한 한국인 순례자는 “까미노에서 버스를 탔다는 건 실패가 아니라, 자신이 끝까지 완주할 수 있도록 선택한 지혜”라고 말했다.

 

버스를 이용하는 장면은 순례길의 전통적인 이미지와는 다소 다를지 몰라도, 이 또한 현실적인 순례의 일부다. 길은 결국 사람마다의 속도와 방식으로 완성된다.

 

 

 

 

순례는 걷는 방식이 아니라 마음으로 완성된다

 

길 위에는 수많은 방식이 존재한다. 지팡이를 짚고 한 발 한 발 걷는 노부부, 무릎 수술을 한 아내를 작은 수레에 태운 남편, 자전거를 타고 속도를 즐기는 청년, 말을 타고 중세를 재현하는 이들, 그리고 버스를 병행하며 현실과 타협한 이들.

다양한 발자국, 하나의 길

결국 이 모든 발자국은 산티아고 대성당 앞에서 한 지점으로 모인다. 대성당 앞 광장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걸어온 이들이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릴 때, 누구도 “당신의 걸음은 불완전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어떻게 걸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마음에 품고 걸었느냐’이다.

 

마음의 순례

어떤 이는 신앙을 위해, 어떤 이는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또 어떤 이는 인생의 전환점을 찾기 위해 이 길에 오른다. 그 마음이야말로 진짜 순례의 완성이다. 걷는 방식은 단지 도구일 뿐,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까미노는 다리를 통해 완성되지 않는다. 마음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그 마음들이 만나 서로를 위로하고, 또 다른 길을 만들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