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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발자국 – Camino Journal》 Day 7. 주비리에서 팜플로나로

joyskim 2025. 10. 2. 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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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2km, 순례 시간 6~7시간)

 

1. 주비리를 떠나며

 

주비리의 아침은 차분하고 묵직했다. 작은 마을을 휘돌아 흐르는 강 위로 안개가 내려앉아 있었고, 돌다리는 그 안개 속에서 마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다리처럼 고요히 서 있었다. 이 다리는 단순히 건너가는 길목이 아니라, 순례자들에게는 출발과 작별, 두 가지 얼굴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돌 위를 딛는 순간, 어제까지의 내가 뒤에 남겨지는 듯했고, 앞으로의 길이 새롭게 열리는 듯했다.

한동안 가만히 서서 다리 아래를 보았다. 물살은 바위를 감싸며 흘렀고, 어느 지점에서는 소용돌이가 생겨 금빛 거품을 올렸다. 나는 눈을 감고 13세기 어느 순례자를 상상했다. 해가 뜨기도 전, 낡은 망토를 여미고 이 다리를 건너던 사람. 혹은 전쟁과 기근의 시대에 가족을 잃고도 신에게 묻기 위해 길을 택했던 사람. 그들의 발소리는 이미 사라졌지만, 강의 냄새와 차가운 공기의 촉감은 시대를 넘어 동일하게 남아 있는 듯했다. 인간은 시대마다 다른 문제를 품지만, 길 위에서 던지는 질문은 놀랍도록 닮아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가, 그리고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가.

 

다리 위에 서 있노라니, 오래전 수많은 순례자들의 발자취가 겹쳐 보였다. 중세의 어느 농부가 무거운 짐을 지고 건너갔을 것이고, 한 수도사가 병든 이웃을 위해 약초를 품고 걸었을 것이다. 혹은 죄를 씻기 위해 회한에 잠긴 발걸음이 이곳을 스쳤을지도 모른다. 돌 위에 새겨진 닳은 흔적은 단순한 마모가 아니라, 인간의 희로애락이 스며든 기록이었다. 나는 그 발자취 위에 내 발을 얹으며, 인생이라는 것도 결국 앞선 사람들의 흔적 위에 덧입혀지는 과정임을 느꼈다.

 

강물은 여전히 흘러가고, 바람은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나는 회사를 마지막으로 나서던 날을 떠올렸다. 30여 년을 오르내린 출근길이 마지막이라는 사실은 쉽게 믿기지 않았다. 정년퇴직이라는 말은 한편으로는 명예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에서 밀려났다는 선고처럼 다가왔다. 동료들은 축하와 아쉬움을 동시에 말했지만, 집으로 돌아오던 발걸음은 공허했다. 지금 주비리 다리 위에서 느끼는 감정이 그때와 닮아 있었다. 내 삶의 한 챕터가 닫히고 새로운 챕터가 열리는 순간, 나는 낯설고도 쓸쓸한 자유와 마주했다.

 

한국 사회에서 퇴직은 늘 양면성을 지닌다.

퇴직 후 며칠은 해방감에 들떠 있었다. 그러나 곧 달력의 빈칸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약속이 없다는 사실이 자유가 아니라 고립으로 다가올 때가 있었다. 연금과 저축을 계산하며 숫자에 마음이 휘둘렸고, 사회의 시선 속에서 스스로의 쓸모를 재단하려는 습관이 도졌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일하는 인간’에게만 후한 점수를 주는지도 모른다. 나는 직함이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질문을 배웠다. 직함이 없어도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무엇인가. 선배, 가장, 관리자 같은 말 대신, 걷는 사람, 배우는 사람, 듣는 사람이라는 더 느린 단어들이 떠올랐다.

 

길은 숲으로 이어졌다. 이른 아침의 숲은 차갑지만 맑았다. 안개 사이로 햇살이 비집고 들어와 흙길을 환하게 밝혔고, 바람과 빛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길을 살아 숨 쉬게 했다. 발자국은 흙 위에 새겨졌다가 곧 사라졌다. 회사에서 쌓아 올린 기록도, 누군가의 책상 서랍 속에서 서서히 지워지고 있을지 모른다. 인생의 흔적이란 결국 덧없고도 덧없는 것 아닐까.

걷다 보니 한 프랑스인 노인과 나란히 걸음을 맞추게 되었다. 그는 은퇴 후 매년 조금씩 카미노를 나눠 걷고 있다고 했다. “인생도 마라톤이 아니라 구간 구간 달리는 릴레이 같지 않습니까? 나는 지금 네 번째 구간을 걷는 중입니다.” 그의 말은 농담 같았지만 묵직하게 마음에 남았다. 인생은 정말 릴레이였다. 부모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아 달리고, 자식에게 넘겨주며, 또다시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나는 후배들에게 무엇을 넘겨주었을까. 단지 자리를 비워준 것일까, 아니면 조금은 지혜와 경험을 건넸을까.

 

나는 걸음을 늦추어 숨을 고르며 주변을 더 자세히 바라보았다. 이끼 낀 돌담 사이로 작은 들꽃이 피어 있었고, 먼 들판에서는 트랙터가 낮게 윙윙거렸다. 도시에서라면 스쳐 지나갔을 장면들이, 여기서는 유난히 또렷했다. 속도를 낮추자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삶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빠르게 달릴 때는 의미가 흐려지고, 느리게 걸을 때 비로소 이름을 얻는다.

 

그의 말은 한국의 세대 문제를 떠올리게 했다. 나의 세대는 치열한 경쟁과 과로 속에서 살았다. ‘희생하면 언젠가 보상받는다’는 믿음으로 달려왔지만, 그 보상은 기대와 달리 허망하게 사라지곤 했다. 후배 세대는 다르다. 그들은 더 이상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삶의 균형을 중시한다. 때로는 그 모습이 가볍게 느껴졌지만, 어쩌면 그것이 더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인생의 릴레이라고 해서 반드시 같은 속도로 달릴 필요는 없는 것이다.

 

라라소냐 마을에 들어서니 바(Bar) 앞이 순례자들로 가득했다. 국적과 언어가 다른 사람들이 작은 테이블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에스프레소를 주문해 자리에 앉았다. 진한 향이 퍼지는 순간, 문득 회사 구내식당에서 마셨던 자판기 커피 맛이 떠올랐다. 바쁘다는 핑계로 허겁지겁 삼켜버리던 그 커피. 지금은 다르다. 한 모금이 지난 세월을 어루만지며, ‘나는 왜 그렇게 서두르며 살았을까, 무엇을 놓치며 살아왔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마을 골목에는 빵이 구워지는 고소한 냄새가 퍼졌고, 아이들이 뛰노는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민들이 주고받는 빠른 스페인어 대화는 음악처럼 흘러갔다. 나는 그 말뜻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 속에서 분명한 생의 활력을 느꼈다. 회사 회의실에서 듣던 무거운 보고와 지시의 어투와는 전혀 달랐다. 언어는 달라도, 이곳의 소리는 삶의 기쁨을 전하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독일인 부부는 결혼 40주년을 기념해 카미노를 걷고 있다고 했다. “아이들을 다 키우고 나니, 우리가 다시 부부라는 사실을 새삼 배우고 있습니다.” 그들의 말은 내 가슴을 깊이 울렸다. 나는 오랜 세월 동안 아내와 나란히 걷기보다 늘 앞서가거나 뒤처져 있었다. 회사 일과 자식 교육, 사회적 책임에 묶여 아내의 표정조차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던 시간들. 은퇴 후에야 함께 걷는 길이 있다는 사실은 늦은 것일까, 아니면 아직 기회가 남아 있는 것일까.

 

한국의 많은 부부들은 자식 이야기만 하다 아이들이 떠난 뒤 낯선 동거인이 되어버린다. 오랫동안 대화조차 나누지 못해, 함께 있어도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나는 그 길을 이미 걷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카미노 위에서라도 다시 마주 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운일 것이다.

 

그때 마을 모퉁이에서는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스페인 대학생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들 중 한 청년은 “공부가 답답해서 잠시 길 위에 나왔다”고 말했다. 그의 웃음에는 젊음의 자유와 동시에 불안이 묻어 있었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도 저 나이 때는 세상에 의문을 던질 용기가 있었던가.’ 한국의 청년들은 취업 경쟁에 치여 이런 자유를 누리기 어렵다. 같은 세대라 해도, 나라와 환경이 다르면 청춘의 무게가 달라진다.

 

스페인 청년과 헤어진 뒤, 나는 한국의 뉴스에서 보았던 청년들의 표정을 떠올렸다. 취업난과 주거비, 불안정한 일자리 속에서 꾸준히 소모되는 젊음. 그럼에도 그들은 유머를 잃지 않으려 애쓰고, 서로의 경험을 나누며 버틴다. 젊은 날의 나는 그들과 얼마나 다를까. 단지 시대의 속도가 변했을 뿐, 불확실성 앞에서 사람이 느끼는 두려움과 설렘은 본질적으로 같지 않을까. 라라소냐의 햇살 아래서 그 생각을 하니, 멀리 떨어진 한국의 하늘과도 어딘가 연결되어 있는 듯했다.

 

바 앞에서 만난 한 노부인은 순례자들에게 물을 나누어주며 “이 길은 모두의 길”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손에서 물컵을 받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 말은 단순한 친절을 넘어, 삶은 결국 모두가 함께 걸어가는 길이며 누구도 혼자가 아니라는 메시지처럼 다가왔다.

다시 숲길로 접어들자 바람은 나무 사이를 헤집으며 속삭였다. 오래전 동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퇴직식 날 찾아와 “선배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라고 말하던 후배, 힘들 때 술잔을 채워주던 동기, 사소한 다툼 끝에 서먹해진 몇몇 사람들. 사람은 결국 사람 속에서 살고, 그로 인해 웃고 울며 상처받고 치유된다.

 

순례길에서는 낯선 이와의 짧은 대화가 오랜 친구와의 고백보다 깊을 때가 많다. 아침에 만난 프랑스인 노인, 독일인 부부, 스페인 대학생, 그리고 친절한 노부인의 말은 내 안에서 또 다른 기억들을 불러왔다. 회사에서의 인간관계, 사회에서의 역할, 가족과의 관계. 길은 나를 끊임없이 회상으로 데려갔다.

 

숲이 끝나갈 즈음, 하늘은 완전히 열렸다. 햇빛은 따뜻했고, 공기는 맑았다. 그러나 내 발은 무겁고, 어깨는 뻐근했다. 하지만 마음은 오히려 가벼워졌다. 길은 내 과거를 꺼내 보여주고, 바람은 그것을 덮어주고 있었다. 주비리의 다리에서 시작된 오늘의 길이 단순히 스페인의 여행이 아니라, 내 인생을 다시 쓰는 긴 사색의 장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오늘 하루 동안 이미 수십 년의 시간을 다시 걸은 듯했다. 과거의 직장 생활, 가족과의 관계, 사회 속의 나, 그리고 지금 이 길 위의 나. 그 모든 것이 겹쳐져 새로운 그림을 만들고 있었다. 길은 단순히 앞으로 나아가게 하지만, 동시에 과거로 되돌아가게 했다. 아마도 내가 걸음을 멈출 수 없는 이유는 거기에 있을 것이다.

 

저녁에 가까워질수록 바람은 더 잔잔해졌다. 나는 오늘의 장면들을 마음속 상자에 차곡차곡 넣었다. 다리의 냄새, 커피의 온도, 낯선 이의 목소리, 그리고 내 마음의 진폭. 언젠가 이 상자를 다시 열어보면,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에게 작은 등불이 되어줄 것이다. 길은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질문을 더 선명하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답하는 일은, 내일의 발자국이 맡을 일이다.

 

 2. 팜플로나, 헤밍웨이의 그림자와 소몰이 축제

라라소냐를 떠나 한동안 숲길과 들판을 걷다 보면, 멀리 붉은 기와지붕이 겹겹이 포개진 도시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팜플로나였다. 중세 성곽이 감싸고 있는 이 도시는 나바라 왕국의 옛 수도이자, 지금도 북부 스페인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곳이다. 좁은 골목과 성문을 지나 도시에 들어서자, 갑자기 공기가 달라졌다. 숲의 고요와는 다른, 도시 특유의 활기와 소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길모퉁이마다 카페와 바가 가득하고, 광장에서는 아이들이 뛰놀며 노인들은 벤치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성문 위로는 오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총탄 자국이 희미하게 보이는 돌벽, 세월에 닳아 둥글어진 계단, 그리고 성곽 위에서 바라본 붉은 지붕들의 바다. 이곳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전쟁과 화해, 신앙과 일상이 뒤섞여 살아온 역사의 무대였다. 나는 그 위에 서서 ‘도시는 언제나 기억을 품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의 옛 성곽 도시들도 비슷하지만, 여기는 유럽의 바람과 햇살이 더해져 또 다른 결을 만들고 있었다.

 

시장 골목에서는 토마토, 올리브, 치즈, 햄이 진열되어 있었고, 상인들의 목소리가 흥정을 이끌었다. 한쪽에서는 작은 악단이 연주를 하고 있었는데, 그 흥겨운 리듬이 도시 전체의 맥박처럼 들려왔다. 숲에서 막 들어온 순례자의 눈에는 이 활기찬 장면이 다소 현란하게 느껴졌지만, 동시에 ‘삶이 이렇게 다채롭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했다.

 

나는 시장 한 모퉁이에서 한 노부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작은 가방에 빵을 담아 건네며 “순례자에게는 힘이 필요하다”고 웃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그 웃음은 길 위의 모든 피로를 잠시 잊게 했다. 도시의 활기는 소음이 아니라 따뜻한 환대로 다가올 때도 있었다.

 

순례길의 무게를 지닌 발걸음은 도시의 활기 속에서 다소 어색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곳은 수많은 순례자가 잠시 머물며 몸과 마음을 추슬러온 장소였다. 고단한 길 위에서 만나는 도시는 오아시스 같기도, 유혹의 장 같기도 하다. 나 역시 땀에 젖은 배낭을 메고 광장을 가로지르며, 이 이질적인 공기의 맛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팜플로나의 이름을 세계에 널리 알린 이는 아마도 어니스트 헤밍웨이일 것이다. 그는 젊은 날 이곳에 머물며 소몰이 축제와 투우에 매혹되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를 썼다. 지금도 구시가지의 바와 호텔에는 그의 흔적이 남아 있다. 어떤 바에는 그가 앉았다는 자리가 표시되어 있고, 사진 속의 헤밍웨이가 묵직한 시선으로 건배를 하고 있다.

 

나는 그 바 앞에 서서 잠시 멈췄다. 수십 년 전, 글을 통해 이 도시를 전 세계에 소개한 한 작가의 열정과 고독이 겹쳐지는 듯했다. 그는 삶을 전장처럼 살았고, 결국 스스로 삶을 내려놓았다. 문학적 천재성 뒤에 깃든 불안과 외로움. 나는 퇴직 후의 공허와 겹쳐 보았다. 직함과 역할이 사라진 뒤의 빈자리, 그것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헤밍웨이처럼 글로, 혹은 나처럼 길 위의 발자국으로?

헤밍웨이가 소설 속에서 그린 팜플로나는 열정과 광기에 가까웠다. 황소가 질주하는 골목, 투우사의 검빛, 젊은이들의 방탕한 밤. 그러나 지금 내가 서 있는 팜플로나는 다르다. 사람들은 일상을 살아가고,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카페에는 일상의 웃음이 흐른다. 한 도시를 바라보는 시선은 결국 자신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청춘의 눈으로 본 팜플로나와, 은퇴자의 눈으로 본 팜플로나는 전혀 다른 도시였다.

 

그 차이를 절감하니, 내 인생의 여러 시절도 떠올랐다. 20대의 나는 성취와 모험에 목말랐고, 40대의 나는 안정과 책임에 매달렸다. 그리고 지금 60대의 나는, 길 위에서 비로소 ‘멈춤’을 배우고 있다. 헤밍웨이가 소설로 기록한 젊음의 열기와 방황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이제 내게 필요한 것은 열기보다는 성찰이었다.

 

광장을 가로지르다 현지인 한 명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는 매년 7월 열리는 산페르민 축제를 이야기하며 눈을 반짝였다. 아침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흰 셔츠와 붉은 스카프를 두르고, 황소와 함께 좁은 골목을 달리는 장면은 이미 세계적인 명물이다. 그러나 그는 곧 진지한 표정으로 “축제는 즐겁지만, 위험도 크다. 사람과 동물 모두 다칠 수 있다”고 말했다. 전통과 스릴, 그리고 위험이 뒤섞인 이 행사가 바로 팜플로나의 상징이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젊은 순례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유튜브에서 그 장면을 보고 꿈을 꾸었지만, 실제로는 너무 무서워 참여하지 못했어요. 그러나 도시의 에너지는 충분히 느껴집니다.” 그의 말은 현대인이 전통을 소비하는 방식, 그리고 경험의 간접화에 대한 한 단면처럼 들렸다.

 

다른 한 순례자는 동물권 문제를 언급하며 고개를 저었다. “관광과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동물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 과연 옳을까요?” 그의 말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축제는 환희이자 갈등이었다. 사람의 흥분이 동물의 고통을 대가로 치러야 하는 것인지, 그 질문은 쉽게 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마음속으로 한국 사회의 여러 축제를 떠올렸다. 화려한 불꽃놀이 뒤에 쌓이는 쓰레기, 축제 이후의 지역 피로. 화려함과 그림자는 언제나 함께였다.

 

나는 그 말에 오래 생각이 머물렀다. 축제의 환희와 위험은, 직장생활의 성취와 소모와도 닮아 있었다. 회사에서의 승진과 성과는 잠시의 환호를 주었지만, 그 이면에는 끝없는 경쟁과 피로가 숨어 있었다. 삶은 언제나 두 얼굴을 갖고 있다. 즐거움과 위험, 성공과 상처. 팜플로나의 소몰이처럼, 사람은 늘 달리며 그것을 동시에 경험한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한국 사회의 ‘속도’가 떠올랐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 빽빽한 일정, 끊임없는 성과 압박. 그것은 마치 황소가 달려오는 골목을 달리는 사람들과도 같았다. 누구도 멈출 수 없고, 잠시 주저하면 곧 뒤처지거나 다칠 수 있다. 그러나 카미노 위에서는 그 속도를 내려놓을 수 있다. 발걸음은 느려지고, 그 속에서 비로소 ‘나’라는 존재가 드러난다.

 

거리에는 헤밍웨이를 기념하는 카페와 서점이 즐비했다. 한 책방 주인은 “헤밍웨이가 우리 도시를 유명하게 했지만, 동시에 그가 보여준 팜플로나는 부분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곳은 순례자의 도시이고, 음악과 음식, 일상의 삶이 있는 곳이지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 도시를 한 작가의 시선으로만 기억하는 것은 편협할 수 있다. 나 또한 한국 사회를 살아오면서 늘 ‘성과와 속도’라는 프레임 안에서만 바라보지 않았던가. 길 위에서는 그 틀을 조금 벗어나고 싶었다.

 

성당 앞 벤치에 앉아 있자, 순례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와인을 나누며 오늘의 길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떤 이는 발에 물집이 잡혀 고통을 토로했고, 어떤 이는 뜻밖의 만남에 들뜬 목소리를 내었다. 나는 그들의 웃음과 한숨을 들으며, 이 도시가 단지 도착지가 아니라 ‘삶이 교차하는 무대’라는 것을 느꼈다.

 

저녁이 가까워지자 도시의 공기는 조금씩 차분해졌다. 붉은 노을이 성곽 위로 번지며, 돌길 위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나는 하루 종일 걸어온 발걸음을 내려놓고, 광장 한가운데 서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바람은 여전히 불고 있었고, 그 속에는 헤밍웨이의 목소리, 황소의 울부짖음, 순례자들의 노래가 뒤섞여 있었다. 오늘 하루의 끝에서, 나는 묘한 충만함과 쓸쓸함을 동시에 느꼈다. 도시의 활기는 내 안의 고독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지만, 그 고독을 다른 색깔로 물들이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광장은 또 다른 얼굴을 드러냈다. 노천 카페에서는 기타 선율이 울려 퍼지고, 사람들은 와인잔을 기울이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어떤 이들은 춤을 추었고, 아이들은 여전히 광장 한켠에서 공을 차며 놀았다. 낮의 소란이 사라지고, 밤의 리듬이 도시에 스며드는 순간이었다. 그 한가운데서 나는 삶의 무대란 결국 낮과 밤, 환희와 고요가 교차하는 장이라는 것을 배웠다.

 

헤밍웨이가 말한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는 구절이 문득 떠올랐다. 젊은 날의 그는 새로운 태양을 향해 질주했지만, 지금의 나는 태양이 다시 떠오른다는 사실 그 자체에서 위안을 얻는다. 내일도 태양은 떠오르고, 길은 다시 이어질 것이다. 은퇴 후의 삶은 화려한 성취보다, 반복되는 일상의 빛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카페 한쪽에서 만난 한 독일인 순례자와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우리는 모두 각자의 황소와 달리고 있다”라고 말했다. 누군가는 직장에서, 누군가는 가정에서, 또 누군가는 내면의 불안과 싸우며 달린다는 것이다. 그의 말은 단순한 비유 같았지만, 나에게는 곧장 한국 사회의 무한 경쟁으로 이어졌다.

 

그 순간 떠오른 건 과거 회사의 회식 자리였다. 모두가 웃으며 건배를 외쳤지만, 속으로는 내일의 보고서와 평가를 걱정하고 있었다. 지금 광장에서 스페인 사람들이 자유롭게 노래하는 모습은 그때와 너무 달랐다. 억지 웃음이 아닌, 진짜 웃음이 있었다. 나는 그 차이가 결국 사회가 주는 여유의 문제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오늘 하루가 단지 걷기의 기록이 아니라 삶의 축소판이었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 숲의 고요, 도시의 소란, 문학의 그림자, 축제의 환희, 그리고 나의 성찰. 이 모든 것이 겹겹이 쌓여 내 안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고 있었다. 팜플로나는 단순히 지도 위의 도시가 아니라, 오늘 하루의 끝을 빛내는 무대였다. 내일 Part 3에서 나는 이 무대 위에서 남은 질문들을 정리하게 될 것이다.

 

3. 하루의 끝, 길이 남긴 것들

하루를 마무리하는 팜플로나의 밤은 생각보다 고요했다. 낮에는 사람과 음악, 소란과 환희가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었지만, 해가 저물고 불빛이 하나둘 켜지자, 도시의 호흡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순례자 숙소에 도착해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고, 간단한 저녁을 마친 뒤 침대에 앉으니, 오늘 하루의 장면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숲길에서의 고요, 라라소냐의 숨결, 팜플로나 성곽의 묵직함, 그리고 광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웃음.

 

나는 그 순간, ‘길 위에서 보낸 하루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다. 아침의 걸음은 고독했고, 낮의 걸음은 대화였으며, 저녁의 걸음은 성찰이었다. 발걸음은 단순히 땅을 딛는 행위가 아니라, 나 자신을 새롭게 써 내려가는 기록이었다.

 

오늘 하루 동안 나는 여러 번 과거로 돌아갔다. 헤밍웨이의 흔적 앞에서는 내 젊은 날의 야망과 불안을 떠올렸고, 소몰이 축제 이야기를 들을 때는 직장생활의 경쟁과 피로를 겹쳐 보았다. 그리고 광장의 순례자들과 마주 앉았을 때는, 인생이란 결국 만남과 이별의 연속이라는 오래된 진리를 되새겼다. 팜플로나는 그 모든 장면을 담아내는 하나의 무대였고, 나는 그 무대의 작은 배우였다.

 

밤이 깊어질수록, 내 안의 목소리는 더 선명해졌다. ‘정년퇴직 이후의 나는 어떤 길을 걷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다시금 떠올랐다. 회사를 떠나면서 나는 한동안 공허함에 사로잡혀 있었다. 누군가의 상사도, 누군가의 부하 직원도 아닌, 그저 ‘나’라는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이 길 위에서는, 오직 한 사람으로서의 내가 분명하게 존재한다. 배낭의 무게와 발의 통증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나는 오늘 하루를 통해 사회와 인간관계에 대한 생각도 깊어졌다. 회사에서의 인간관계는 대부분 목적과 이해관계로 얽혀 있었다. 그러나 길 위에서의 관계는 달랐다. 함께 걷고, 물을 나누고, 아픈 발을 보듬어주는 아주 단순한 연대였다. 팜플로나 광장에서 만난 낯선 순례자의 한마디가 내 마음을 더 울린 것은, 그것이 이해관계가 아니라 진심에서 비롯된 말이었기 때문이다.

 

길 위에서 사람을 만나는 방식은 어쩌면 인생 후반부의 인간관계에 대한 좋은 모델일지 모른다. 더 이상 성과나 목표가 아닌, 존재 자체로 만나고 교류하는 관계. 나이가 들어갈수록 필요한 것은 화려한 네트워크가 아니라, 진실한 몇 마디의 위로와 공감 아닐까.

팜플로나의 밤은 내게 또 다른 깨달음을 주었다. 도시의 불빛은 화려했지만, 그 불빛은 언젠가 꺼진다. 반면 오늘 내가 걸어온 발자국은 영원히 남는다. 땅 위에 새겨진 발자국은 비록 바람과 비에 지워질지라도, 내 안의 기억과 사유는 사라지지 않는다. 길은 그렇게 사람의 내면에 흔적을 남긴다.

 

나는 침대에 누워 조용히 숨을 고르며, 오늘 하루를 인생의 축소판처럼 되새겼다. 아침에 집을 나서 젊음을 지나고, 정오에는 분주한 사회를 헤치며 살아가고, 저녁에는 고독 속에서 성찰하는 노년을 맞이하는 것. 카미노의 하루는 곧 인생의 여정이었다.

 

‘내일은 또 어떤 장면을 만날까?’라는 기대가 마음을 가득 채웠다. 고단한 하루였지만, 이상하게도 피로보다 충만함이 더 크다. 이 길을 걸으며 내가 찾고 있는 것은 단순한 종착지가 아니라, 매일의 하루가 남긴 성찰의 파편들이다. 그 파편들이 모여 결국 내 인생의 새로운 지도를 만들어줄 것임을 나는 직감했다.


음식과 문화의 기억

팜플로나의 저녁 식탁은 또 다른 풍경이었다. 숙소 인근 바에 들러 간단히 타파스를 주문했는데, 올리브와 멸치, 감자튀김 위에 매콤한 소스를 얹은 파타타스 브라바스가 나왔다. 와인 잔에 담긴 리오하 지역의 적포도주를 한 모금 머금자, 오늘의 피로가 천천히 풀려나갔다. 서로 마주 앉아 잔을 부딪치며 하루를 정리했다. 음식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한국에서의 식사는 대개 빠르고 실용적이었다. 점심시간 30분 동안 허겁지겁 먹어치우던 회사 생활의 식탁은 늘 긴장과 서두름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이곳의 저녁은 달랐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대화가 음식보다 중요했다. 한 접시의 타파스를 두고도 오래 이야기를 나눴다. 그것이 바로 삶의 여유였고, 우리가 그토록 갈망했던 삶의 리듬이었다.


함께 걷는 아내, 함께 걷는 말들

우리는 오늘도 서로의 보폭을 맞췄다. 아침엔 내가 앞서고, 오르막에서는 그녀가 더 강했다. 물집이 도드라진 발을 서로 번갈아 살피고, 휴식 시간마다 간단한 스트레칭을 함께 했다. 말이 필요 없는 시간이 있었고, 말이 넘치는 순간도 있었다. 숲길에서는 침묵이 더 편했고, 도시로 들어서자 이야기가 길어졌다.

 

라라소냐를 지나며 그녀가 말했다. “지금까지의 길이 내 삶의 선택을 확인해주는 것 같아.” 그 한마디에 많은 시간이 겹쳐 보였다. 아이들이 자라 독립해가는 일, 부모님 곁에서 보낸 계절들, 우리 둘이 감당했던 크고 작은 파도들. 이 길은 우리가 함께 선택했고, 함께 견디고, 함께 기뻐하는 과정이었다.

 

가끔 사소한 의견 충돌도 있었다. 어느 바에 들를지, 오늘은 어디까지 걸을지. 하지만 그 작은 다툼은 금세 다른 이야기로 덮였다. 길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완벽한 합의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동행이었다. 서로의 숨을 듣고, 서로의 속도를 인정하는 일. 그것이 우리가 이 길에서 배우는 결혼의 또 다른 형태였다.


세계인의 도시, 세계인의 대화

오늘 밤 숙소의 작은 주방에서는 다양한 국적의 순례자들이 모여 있었다. 독일인, 프랑스인, 일본인, 브라질인. 서로 다른 언어와 억양으로 대화를 이어갔지만, 주제는 놀랍게도 비슷했다. “왜 우리는 걷는가?”라는 질문. 누군가는 신앙을 위해, 누군가는 잃어버린 자신을 찾기 위해, 또 누군가는 그저 새로운 모험을 위해 걷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인류가 얼마나 닮아 있는지 새삼 깨달았다. 국적은 다르지만, 모두 삶의 의미를 찾고자 길 위에 서 있다는 점에서 같았다. 팜플로나는 단순히 한 도시가 아니라, 세계인이 모여 서로의 인생 이야기를 교환하는 하나의 광장이었다.


하루의 끝, 내 안의 울림

이제 등을 기대고 눈을 감으니, 하루 동안의 장면들이 다시금 스쳐 간다. 숲의 바람, 도시의 소란, 헤밍웨이의 그림자, 축제의 환희, 낯선 이의 위로, 그리고 곁을 지키는 동행의 숨결. 이 모든 것은 결국 우리에게로 돌아왔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길 위에서의 하루는 질문으로 끝난다. 그러나 그 질문은 결코 공허하지 않다. 오히려 내일의 발걸음을 준비시키는 힘이 된다. 팜플로나의 밤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화려한 불빛이 아니라, 내면 깊은 곳에서 깨어난 울림이었다.

우리는 내일을 향한 기대 속에서 눈을 감았다. 길은 끝나지 않았다. 오늘 하루가 남긴 성찰은 내일의 걸음을 더 단단하게 할 것이다. 그렇게, 카미노의 하루는 또 다른 인생의 한 장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