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까미노를 생각하는가 ⑱
글쓰기, 그림, 창작을 위한 영감의 여정
— 세상이 아닌 내 안의 목소리를 다시 듣기 위하여
작은 멈춤 없는 수신행위다
글이 막히고, 그림이 흐릿해지고,
어떤 말도 색도 나에게서 멀어질 때가 있다.
컴퓨터 앞에 앉아, 하얀 종이를 바라보며,
나는 내가 더 이상 쓸 말이 없다고, 그릴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재능의 고갈이 아니라,
삶의 감각이 메말라 있던 시기였다.
창작이란 결국
세상과 나 사이의 미세한 떨림을 포착하는 일인데,
나는 너무 오랫동안 같은 공간, 같은 시간 속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까미노를 떠올렸다.
걷는다는 것, 세상을 스케치하는 시간
까미노 위에서 나는 다시 관찰자가 되었다.
- 자갈길을 밟을 때마다 달라지는 발의 감각
- 무성한 들꽃 사이로 흔들리는 바람의 결
- 고개 너머로 떨어지던 석양의 선명한 분홍색
- 알베르게 창가에서 들려오던 누군가의 웃음소리
이 모든 것이 하루에 수십 번씩 나의 마음을 흔들었고,
그 흔들림은 곧 단어가 되고, 색이 되고, 리듬이 되었다.
까미노는 내게
창작은 책상 위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장면 속에서 탄생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다시 쓰기 시작했다
길 위의 작은 벤치에서,
먼 풍경을 바라보며 꺼낸 낡은 노트에
나는 처음엔 몇 단어만 적었다.
- 오늘 본 색깔
- 마주친 사람의 한마디
- 몸이 아팠던 구간
- 아주 작게 웃었던 순간
그렇게 적기 시작한 메모들이
나중에는 단락이 되고, 그림이 되고, 나만의 이야기의 재료가 되었다.
나는 다시,
‘느끼는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예술은 느린 시간 속에서 피어난다
도시의 삶은 너무 빠르다.
정보는 넘치고, 비교는 일상이 되고,
창작조차 성과와 숫자로 측정된다.
그러나 까미노는 나에게 말해주었다.
진짜 예술은 느린 리듬 속에서, 조용히 움튼다고.
햇빛 아래에서 그림자를 그리는 사람,
들판에서 먼 풍경을 바라보며 조용히 펜을 꺼내는 이,
새벽에 일어나 텐트 안에서 시를 쓰는 순례자.
그들은 모두 창작자였다.
세상에 보여주기 위한 글이 아니라
자신을 더 깊이 들여다보기 위한 글과 그림을 남기고 있었다.
까미노는 내게 말해주었다.
“창작은 나를 되찾는 길이기도 하다.”
더 잘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잘 느끼기 위해서 걷는 길.
그 길 위에서 나는,
말과 색과 나의 감정이 다시 연결되고 있다는 감각을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