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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걷는가?

joyskim 2025. 5. 5.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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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걷는다는 것의 의미

하루에도 수천 걸음을 걷는다. 거리로 치면 수 킬로미터에 달할 수도 있다. 누군가는 출근길에서, 누군가는 산책 중에, 또 누군가는 아무 목적 없이 길 위를 걷는다. 하지만 이런 질문을 던져본 적이 있을까? “나는 왜 걷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육체 활동을 넘어 인간 존재의 깊은 층위와 연결되어 있다. 걷기는 삶을 구성하는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보편적인 행위 중 하나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걸음을 배우고, 걷기 시작한 순간부터 삶의 리듬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걷기는 단순한 이동을 넘어 사고의 흐름, 감정의 순환, 정체성의 확립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전면적인 경험과 얽혀 있다.

2. 걷기의 진화적 기원

인간이 걷기 시작한 것은 약 400만 년 전, 초기 인류가 두 발 보행을 시작하면서부터다. 네 발로 걷던 조상들과 달리, 우리는 직립 보행을 선택했다. 그 결과, 손이 자유로워졌고, 도구를 만들 수 있었으며, 시야는 넓어지고 사냥과 채집 활동의 효율이 향상되었다.

직립보행은 단순히 몸의 자세만을 바꾼 것이 아니다. 뇌의 발달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신체를 균형 있게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신경계의 조율이 필요했고, 이는 곧 뇌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다시 말해, 인간은 걷기 위해 생각해야 했고, 생각하면서 더 인간다워졌다.

걷기는 인간 진화의 핵심적 도구였다. 우리가 지금의 사회를 만들고, 예술을 창조하고, 철학을 논할 수 있게 된 밑바탕엔 ‘두 발로 걷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3. 걷기와 사고의 관계

철학자 장 자크 루소는 “나는 걷는 동안에만 생각할 수 있다”고 말했고, 프리드리히 니체 역시 “모든 위대한 생각은 걷는 중에 떠오른다”고 했다. 이 말은 단순한 수사법이 아니다. 실제로 걷기는 인간의 인지 능력과 깊은 관련이 있다.

현대 심리학자들은 걷기가 창의성과 문제 해결 능력을 높인다는 연구 결과를 다수 발표했다. 예컨대, 스탠퍼드 대학의 연구에서는 걷는 동안 사람들의 창의적 사고가 평균보다 60% 이상 향상되었다고 한다. 걷는 동안 우리의 뇌는 좌우 반구가 더욱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혈류가 원활해지며, 생각이 더 자유롭게 떠오를 수 있는 상태가 된다.

걷기는 일종의 사유 촉매다. 반복적이고 규칙적인 리듬은 마음을 안정시키고, 주변의 자극과의 거리감을 유지하며 내면의 소리를 듣게 만든다. 사색의 도구로서 걷기는 책상 앞에서의 집중보다 때로 더 깊은 통찰을 가져다준다.

4. 걷기의 심리적 효과

우울하거나 불안할 때 우리는 종종 “어디라도 나가서 좀 걷고 와야겠다”고 말한다. 걷기는 실제로 감정 조절에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 정신의학에서는 걷기를 포함한 가벼운 유산소 운동이 우울증과 불안장애 치료에 보조적으로 쓰인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걷는 동안 분비되는 엔도르핀과 세로토닌은 뇌의 긍정적인 상태를 유도하고, 스트레스를 완화시킨다. 무엇보다 걷기의 장점은 ‘쉽고, 돈이 들지 않으며, 장소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운동복을 챙겨 입지 않아도 되고, 헬스장에 가지 않아도 된다. 그냥 지금, 이 순간, 문을 열고 나가서 걸으면 된다.

걷는 동안 우리는 생각을 정리하고, 감정을 비워낸다. 쌓여 있던 긴장과 불안이 점차 허물어지고, 삶의 속도가 느려진다. 걷기는 ‘내가 나 자신을 다시 회복하는 일’이기도 하다.

5. 도시에서 걷는다는 것

도시 생활은 걷기를 점점 사라지게 만든다. 빠른 이동을 위해 우리는 자동차와 지하철, 전동 킥보드를 사용한다. 도심 속 보행자의 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걷는다는 것은 특별한 활동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도시야말로 걷기의 필요성이 가장 큰 공간이기도 하다.

도시는 늘 자극적이고 분주하다. 그 안에서 걷는다는 것은 소란 속의 고요를 찾아가는 일이다. 이어폰을 빼고,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고, 그저 발걸음에 집중해 보자. 가로수의 잎사귀, 지나치는 사람들의 표정, 건물 틈새의 고양이 — 걷는 동안 발견하는 이 작은 것들이 도시를 다시 살아 있는 공간으로 만든다.

도시 걷기는 단순한 이동을 넘어, 공간을 경험하고, 도시를 새롭게 읽어내는 ‘해석 행위’다. 우리가 어떤 길을 걷느냐에 따라 도시의 표정도 바뀌고, 나의 내면도 달라진다.

6. 걷기는 관계다

걷기는 혼자만의 시간이 될 수도 있지만, 타인과의 관계를 잇는 매개가 되기도 한다. 산책을 함께 하는 연인, 퇴근 후 함께 걷는 친구, 운동 겸 동네를 도는 가족. 걷는 동안 우리는 말없이 나란히 걷고, 때론 대화를 나누며 관계를 돈독히 한다.

특히 아이들과 함께 걷는 경험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 안에서는 놓치는 것들 — 나무 그림자, 하늘 색, 바람 소리 — 을 아이들은 걷는 동안 천천히 체험한다. 걷기는 삶의 속도를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는 일이며, 함께 세상을 발견하는 방법이다.

7. 걷기의 사회적 가치

걷기는 또한 사회적 실천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걷기 운동'은 단순히 건강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보행자 중심의 도시를 만들자는 선언이자, 기후 위기 시대에 친환경적 대안이 되기도 한다. 걷기를 장려하는 도시는 더 안전하고, 더 살기 좋은 공간이 된다.

또한, 걷기 운동은 사회적 고립을 줄이고 공동체의 연결을 강화하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누구나 함께 걸을 수 있다는 단순함이야말로 걷기의 가장 민주적인 면모다.

8. 걷는 삶을 위하여

걷기는 거창하지 않다. 특별한 장비도 필요 없다. 다만, 하루에 10분이라도 나를 위해 걷는 시간을 만든다면, 삶은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한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도착'에만 집중해 왔다. 어디에 가는지, 얼마나 빨리 가는지가 중요했지, 어떻게 가는지는 관심 밖이었다. 그러나 걷기는 ‘과정’ 자체를 경험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걸으면서 주변을 본다. 냄새를 맡고, 들리고, 느낀다. 그것은 '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제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나는 얼마나 걷는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마음으로 걷는가?”